오늘은 동호가 좋아하는 음악수업이 있는 날입니다. 특별히 음악실에서 수업을 하기 때문이지요. 동호는 특별히 음악수업을 좋아하였습니다.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아이들은 자리를 정돈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음악 선생님이 들어오시고 수업을 시작하셨지요. 교과서를 보니 오늘은 판소리에 대해 배우는 날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대뜸 아이들에게 눈을 감으라고 하더니 카세트테이프를 틀었습니다. 그러자 테이프에서는 예전에 들어본 적 있는 판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소리가 흘러나오자마자 머리가 주뼛거리고 이상한 전율이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모두 수업이 지루했다고 투덜거렸습니다. 재미도 없고 지루하기만 한 판소리보다 뮤지컬이나 오페라가 더 좋다고 삐죽거렸지요. 하지만 동호는 친구들의 의견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학교 수업이 끝날 때까지 판소리의 여운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동호는 가방도 푸르기 전에 판소리에 대해 검색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오늘 수업시간에 들었던 신재효 선생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밤이 되고 동호는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동호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의 주변은 온통 상투를 튼 사람들과 한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리고 한 고즈넉하게 자리한 초가집에서 낯익은 얼굴의 할아버지가 나왔습니다.
바로 동호가 오늘 공부한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 선생이었지요. 반가운 마음에 동호는 선생께 알은체를 하였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을 이렇게 만나 뵙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선생님께서 판소리 여섯 마당을 엮으신 분이시지 않습니까?”
“이놈, 네가 나를 어찌 아느냐. 소리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 것이냐.”
동호는 신이 나 신재효 선생 앞에서 그날 배운 판소리와 동호가 느낀 소리에 대한 마음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러자 신재효 선생도 그런 동호가 기특했는지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동호는 꿈속인지 아닌지 신재효 선생 뒤를 따라 다니며 직접 소리에 대한 진심을 배우고 우리 소리에 대한 마음을 배웠습니다. 동호가 아는 단순한 판소리의 지식이 아니었지요.
따르릉 울리는 전화소리에 동호는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잠에서 깬 동호는 어리둥절하였습니다. 신재효 선생님을 만나 몇날 며칠 판소리를 배우던 것이 모두 꿈이었던 것이니까요.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에 너무 생생하였던 동호는 당장 고창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신재효 선생이 머물던 고택에 도착하였지요.
꿈에서 보던 초가집이 그대로 있고 꿈속에서 선생과 함께 배우던 것들과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꿈속에서 선생과 함께한 집안 곳곳을 둘러보던 중 이상한 증표가 하나 보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동호가 꿈속에서 몰래 남긴 흔적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동호는 그것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혼란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꿈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마음 한편에 찡한 무엇인가가 느껴졌지요. 그것은 음악수업시간에 판소리를 들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였습니다.
동호는 신재효 선생이 밟았던 길을 밟고 싶어졌습니다. 한참을 고택에 머물던 동호는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선생님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길을 나섰습니다.
우리의 소리를 찾기로 한 동호의 마음속에는 선생의 소리의 한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습니다.
가을이 오긴 왔다. 빨강 노랑 어여쁜 색으로 단장을 마친 나뭇잎들이 살랑대며 약을 올리는 가을 말이다. 불과 3주 전만해도 기어코 올해는 꼭 주원과 단풍을 보러 가겠다고 다짐하였으나 지금은 이렇게 혼자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깍지 낀 손을 꼭 마주잡고 오르기로 하였던 단풍놀이는 어디로 갔을까.
“또 또 또! 나 실연당했어요. 자랑할 일 있어? 얼굴 좀 펴.”
친구라는 것이 자신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찍힌 셀카를 남자친구에게 전송하면서 말한다. 그러자 또 다른 친구가 한 술 더 떠 거든다.
“그래! 너 자꾸 그렇게 죽상하면 주원인지 뭔지가 알아주기나 할 것 같애? 너만 손해야. 너만.”
가뜩이나 머리도 복잡하고 마음도 복잡한데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신경을 건드린다.
“자꾸 잔소리 할 거면 너희 먼저 올라가.”
“기집애, 괜히 우리한테 화풀이지. 너 그렇게 굼벵이처럼 굴 거면 진짜 우리먼저 간다.”
매정한 것들. 친구들이라고 기분 풀어준다며 기어코 끌고나오더니 이제는 지들끼리 다닌단다. 차라리 그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여자는 먼저 산길을 올라가는 친구들의 발걸음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곧 비가 오겠는데? 길을 걷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그제야 혼자임이 실감이 난 여자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애들은 어디로 간 거야. 전화도 안 받고.
앗. 여자의 발목이 잠시잠깐 춤을 추듯 움직였다.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나뭇가지에 걸린 탓이다. 여자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아픈 것도 아픈 것이었지만 서러움의 무게가 더욱 그녀의 눈물샘을 짓눌렀다.
“괜찮으세요? 아까 보니까 발목이 삐끗한 것 같던데.”
낮은 음색의 목소리가 주원과 비슷했다. 이렇게 순간순간 주원이 떠오르는 자신이 싫었다. 도움은 고마웠지만 복잡한 심경이 더욱 컸던 여자는 귀찮다는 듯 괜찮다는 말을 하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얼굴을 들었다.
“곧 비가 내릴 거라던데. 잠시 비를 피했다 가시는 게 좋겠네요. 부축 해드릴 테니까 제 어깨 잡으세요.”
“괜찮아요. 그까짓 비.”
여자는 상냥하게 말하는 남자에게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소나기처럼 제법 쌀쌀하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괜찮다니까요. 정말!”
여자는 신경질적인 표정과 말투로 남자를 다시 한 번 올려다보았다. 그때 한 두 방울 빗방울이 여자의 이마에 톡톡하고 떨어지더니 이내 굵은 빗줄기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남자는 거보라며 여자의 신경질에도 불구하고 여자를 부축해 굴 안으로 몸을 피했다.
“제법 굵은 비가 오네요. 마치 장맛비처럼.”
“…”
“혼자 온 거에요? 저기 연리지 나무 봤어요? 사랑하는 사람이랑 함께 보면 영원히 이루어진다고 하던데.”
“도와준 건 고마운데요. 이렇게 다리를 삐끗했는데도 도와줄 사람도 없는데 연리지 나무가 무슨 소용 있겠어요? 정말 짜증나게.”
여자는 남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으나 늘 주원에게 투정을 부리던 것처럼 남자에게 짜증을 늘어놓았다. 왠지 이 남자라면 주원처럼 그녀의 짜증을 받아줄 것 같았다.
“다리는 좀 괜찮아요?”
“네, 덕분에요.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괜히 짜증 부려서 미안하고요.”
“비가 금방 그칠 것 같네요. 금세 하늘이 맑아졌어요. 많이 힘든 것 같은데 비는 이렇게 금방 그쳐요. 그리고 다시 맑은 하늘과 바람과 햇살이 비추죠. 그쪽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다른 때 같았으면 웬 오지랖이냐며 속으로 한바탕 욕을 했겠지만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빗방울이 점점 얇아지며 먹구름이 가신 자리에는 한 그루의 예쁜 연리지 나무가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래된 수탁의 아침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삐거덕 하는 문을 열고 조용한 걸음걸이의 소녀 설화가 나왔습니다. 마을에서 설화라는 소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효녀로 소문이 나있었지요. 설화는 아픈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신해 마을일을 돕고 바느질 삵을 받아 근근이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번 돈으로는 반찬은 가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쌀을 사기도 힘들었답니다. 소녀 설화는 마을일을 도와드리며 반찬 조금씩을 얻어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소녀가장이 된 설화의 착한 심성과 딱한 사정을 아는 마을사람들은 집에 있는 반찬을 조금씩 바가지에 담아주었습니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의 반찬을 따로 담을 수 없어 그만 한 바가지에 나물들이 전부 섞여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도 반찬들을 얻었다는 기쁨에 한달음에 달려간 설화는 나물들이 섞인 바가지에 밥을 넣어 숟가락으로 비벼 상을 차렸습니다. 부모님께 이렇게 밖에 상을 차리지 못했다는 죄송스런 마음이 들었지요. 설화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처음 보는 생소한 밥에 두 눈이 휘둥그레 졌습니다. 그런데 막상 먹어보니 그 맛도 맛있고 다른 찬을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어서 더 잘됐다고 설화를 위로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설화가 막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낯선 행색의 웬 남자가 설화의 집 앞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행색을 보니 이 동네 사람은 아닌 듯싶었지만 사람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되어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우선 물을 먹여 목을 축이게 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었습니다. 그러자 남자가 정신을 차리고는 고마운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달리 내 드릴 것이 없던 설화는 금방 얻어온 반찬들과 산에서 캐온 나물들을 섞어 고추장과 함께 내드렸습니다.
“소녀, 집안 살림이 누추하여 이런 것 밖에 내 드릴 것이 없사옵니다. 송구스럽습니다.”
남자도 생전 처음 보는 밥상에 잠시 놀랐으나 고추장에 쓱쓱 비벼 맛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맛도 맛이지만 밥에 들어간 나물들이 모여 이만한 영양가를 내는 밥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밥의 이름이 무엇이냐? 혹, 밥을 이렇게 만들게 된 경위를 내게 알려줄 수 있겠느냐?”
“이 밥에 이름은 달리 없사옵니다. 사실….”
설화는 집이 가난하여 이웃사람들에게 얻은 반찬이 우연히 섞여 밥과 함께 먹은 것이라고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허허. 그것 참 딱하면서도 놀랄 일이구나. 사실 나는 궁에서 시찰을 나온 암행어사니라. 아까는 잠시 현기증이 나 쓰러져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너를 만난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이런 천한 음식을 내 드렸으니, 송구할 따름입니다.”
“아니다. 밥과 함께 갖가지 나물들을 비벼먹는다... 비빔밥이 좋겠구나!”
“네? 비빔밥이요?”
“그래, 이 마을이 전주이니 전주비빔밥이 좋겠구나.”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암행어사가 다시 설화의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왕실의 수라간 나인이 되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임금님이 드시는 음식을 손수 차릴 수 있다는 생각에 승낙한 설화는 궁으로 들어갔습니다. 궁에는 수많은 음식들이 있었습니다. 설화는 갖가지 좋은 재료 중에서 나물과 고기를 가지런히 밥 위에 올려 수라상을 만들었습니다. 맛을 본 임금은 이름을 음식의 이름을 물었고 설화는 그 때 암행어사가 지어준 이름을 대었습니다.
맛의 우수함과 영양까지 두루 갖춘 전주비빔밥의 시작은 우연함이었지만 궁중음식으로 사랑받으며 전주의 제일가는 음식으로 지금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안녕? 마일로. 나 동호야.
벌써 네가 우주로 간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어. 벌써 보고 싶다. 너와 처음 만난 날은 절대 잊을 수 없을 거야. 쪼글쪼글한 얼굴에 귀여운 외모를 가진 너는 나보다 키가 훨씬 작아서 난 네가 개미인 줄 알았다니까.
고인돌 앞에서 우연히 널 처음 만났을 때 네가 하도 작아서 내가 널 밟을 뻔한 것도 기억이 생생해. 그땐 정말 아찔했는데 말이야. 그때 넌 머나먼 별에서 왔다고 하며 이곳이 어딘지 물었었지. 특히 넌 고인돌을 보고 이 큰 돌이 무엇이냐고 신기해했었지.
널 우리 집으로 몰래 들여보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것이 생각나. 넌 내가 사는 지구 그리고 우리 마을에 대해 궁금해 했고 난 네가 살고 있는 우주에 대해 궁금해 했었지. 그래서 우주에서 온 너를 위해 나로우주센터과학관에 널 데려갔었지. 그때 넌 정말 신기해하면서도 집에 가고 싶어 했던 것이 생각나. 그리고 난 과학자를 꿈꾸고 있기 때문에 널 만난 것을 참 행운이라고 생각했어. 너에게 직접 우주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우주과학센터에서 보는 것들에 대해 너와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어.
그리고 넌 우주로 오는 지구인들을 봤다는 이야기도 했었지. 그때 넌 정말 신기해했는데. 지구인들은 우주에 오면 신기한 옷을 입고 생활한다면서 말이야.
우리 고흥은 특히 과학의 도시야. 너도 알다시피 우리 고흥에서는 100kg급의 인공위성으로 지구 저궤도에 진입시킬 수 있는 한국 최초 우주발사체 나로호 발사 준비에 한창이었지. 사실 1차와 2차를 발사했었지만 아쉽게도 실패했었어.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3차 준비에 매진하던 시기였어. 그때 널 만난 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고.
넌 왜 고흥에서 나로호를 발사하는 것이냐며 궁금해했었지? 그건 발사장 주변의 안전과 발사각도, 발사장의 여러 시설의 설치 등을 생각해서 발사해야 하기 때문이야. 특히 우리 고흥은 발사운용 각도가 15도로 넓고 발사체를 발사했을 때 발사체의 추락과 같은 국제적인 문제도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들었어. 나 꽤 똑똑하지? 네가 다시 우주로 돌아가고 더욱 우주와 과학에 대해 궁금해졌어.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지.
아참! 나 너와 약속했던 비밀 아직도 지키고 있어. 바로 3차로 발사될 나로호에 널 몰래 태운 말이야. 지금 생각해도 심장이 두근거린다니까. 나로우주과학관에서 나온 넌 네가 살던 별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면서 눈물을 보였었잖아. 그때 나도 무척이나 가슴이 아팠었어. 그래서 생각했지. 네가 우리 마을로 떨어진 날이 1월 28일이었잖아. 그런데 1월 30일에 나로호 3차 발사가 예정되어있었어. 그래서 널 몰래 나로호에 태웠었지.
그래서 나로호가 발사되는 것이 나에게는 더욱 뜻깊은 일이 되었어. 네가 나로호에 탄 것은 아마 우리나라 사람 아무도 모를 거야. 그리고 난 네가 나로호에 탔기 때문에 3차 발사에 성공하길 더욱더 간절하게 바랐어.
나로호 발사를 몇 분 남겨놓지 않고 너와 작별인사를 했을 때가 생각나. 널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야. 그래도 널 너의 별나라로 보내줄 수 있어서 기뻤어. 그리고 나도 더 열심히 공부해서 2021년에 다시 한 번 발사될 한국형 발사체에 탑승해 널 꼭 다시 만나고 싶어. 너와 함께 보냈던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될 거야.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어. 비록 너의 소식을 들을 수는 없지만 네가 잘 도착해서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야. 그럼 다음에 또 만날 때까지 안녕. 동호가.
나는 지금 마른 풀을 엮어 만든 움집 앞에 있다. 거대한 버섯을 말려둔 것 같은 모양의 움집 안에서, 금방이라도 온몸에 진흙을 묻힌 원시인 하나가 기다란 창을 들고 나올 것만 같다. 움집 안에서는 바싹 바른 여자 하나가 떨고 있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곰이 나타날 것만 같아서 말이다.
“엄마, 다른 데로 좀 가자니까요? 나 숙제하려면 사진 많이 찍어야 한단 말예요.”
옆에서 아들이 몇 번이고 옷을 당기는데도 나는 그 움집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몇 년 전, 남편과 함께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시간과 운명의 인과관계를 다룬 영화였는데, 다른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 있었다. 바로 우울증에 걸린 여주인공을 지키는 주인공의 모습이, 곰으로부터 아내를 지키는 원시인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원시 복장 차림의 여자에게 이제는 곰이 없다고 되뇌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 오래도록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제, 초등학생인 아들이 기행문을 써야 한다며 나를 졸랐다. 가까운 곳에 무엇이 있나 보았더니, 하필이면 그게 또 선사유적지였다. 나는 영화 속의 그 장면이 꿈에도 나오더니, 이제는 내가 선사유적지를 찾아가게 된 것이었다. 원시인과 내 사이에 운명의 끈이라도 연결되어 있는 것인가 하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했었다.
아들이 다시 내 옷자락을 당겼다. 알았어, 알았어. 나는 못이기는 체 걸었다.
아들을 낳고, 나는 꽤 길게 산후우울증을 앓았다. 눈앞에 내 몸에서 나온 아이가 있는데도 몸속이 비어버린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울고, 짜증을 냈으며, 사소한 일로도 남편과 크게 싸웠다.
몇 년이 지나, 우울증은 모두 나았지만 나는 남편을 잃었다. 그 동안 쌓여 온 앙금을 쉽게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잠시 머리를 식히고 오겠다던 남편은 두 달이 넘게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남편이 어디 있는지 찾으려 하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없는 곰을 두려워하며 움집 안에 웅크리고 있었던 내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었다.
아들은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처음 보는 원시인들의 모습에 신이 난 모양이었다. 움집 앞 여기저기에 사냥 도구를 만들거나, 잡아 온 사냥감을 굽고 있는 모습들의 황동상들이 서 있었다.
“엄마! 저것 좀 봐요!”
아들이 가리키는 곳에는 나무 막대를 들고 남자에게 사냥법을 배우고 있는 어린 원시인의 모습을 한 황동상이 서 있었다. 아들은 바닥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들더니, 그 모습을 똑같이 흉내 내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말했다. 뷰파인더에 눈을 가져다 댔는데, 남자 원시인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여자 원시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인간이란 어쩌면 저렇게 오랜 세월 동안 한결같은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먼 옛날, 선사 시대에 살았던 나도 움집 안에 웅크리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나는 이제 곰을 두려워하지 않아.’라고 의미 모를 문자 한 통을 보냈다. 별다른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보낸 문자였다. 잠든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나는 휴대전화에 찍힌 정다운 발신자명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자, 남편이 문자 한 통을 보내왔다. 나는 남편의 문자를 보고 울었다. 나는, 나의 움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내 옷깃을 단단히 여며 주시는 할머니의 눈가가 젖어 있었다. 어제의 낙산사에 이어 오늘은 보문사였다. 내일은 또 보리암에 간다고 하셨다. 전국의 유명한 절이란 절은 다 돌아보실 것이라고 하셨다.
엄마는 오랫동안 앓다가 얼마 전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할머니는 엄마가 자꾸 꿈에 나온다며,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서러웠으면 그러겠냐며 자꾸만 우셨다. 할머니는 오늘 기도를 하시며 또 우실 것이다.
할머니가 절을 하시는 동안 나는 몰래 기도하는 곳을 빠져나왔다. 엄마는 재미없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러니까 할머니가 기도하며 우시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실 것이다.
할머니는 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나를 데리고 절에 가셨다.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가 보았을 때에는 다들 재미있게 웃고 떠들고 있었는데, 절에 오면 너무 조용해서 무서웠다. 할머니는 슬픈 일이 있을 때에만 절에 가셨기 때문에, 내가 조금만 장난을 쳐도 혼을 내셨다. 그래서 나는 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절은 우울한 사람들이 오는 곳일 거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엄마가 몸이 아프기 전에, 엄마는 딱 한 번 나를 데리고 가까운 절에 가셨다.
“싫어. 절에 가면 재미 하나도 없단 말이야. 말도 안하고 계속 인사만 하잖아.”
나는 가지 않겠다고 한참을 버텼지만, 엄마의 애교에는 이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엄마는 절에 도착해서도 기도하러 부처님 앞에 가지 않으셨다. 그냥 마당에 앉아 강아지랑 놀거나 연못을 구경하거나, 나랑 같이 사진을 찍으면서 시간을 보내셨다. 스님이 사탕이랑 과자도 잔뜩 가져다 주셔서 그때는 정말 신이 났었다.
그 때처럼 재미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하고 돌아다니는 중에, 나는 수백 개나 되는 불상이 앉아 있는 곳을 발견했다. 어른들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거나 소원을 빌고 있었다. 할머니처럼 모두 슬픈 표정을 하고 있을 것 같아서 선뜻 가까이 가지 않았는데, 다들 웃고 있었다. 대체 불상이 뭐가 재미있어서 웃는 것일까. 자세히 보니 불상들도 웃고 있었다. 머리카락이랑 입술에 알록달록한 색이 칠해진 불상들이 재미있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바로 옆에 있는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들도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옆에 있는 건물로 달려가 보니, 이번에는 우리 반 교실만큼 커다란 부처님이 옆으로 누워서 자고 계셨다. 지금까지 내가 본 부처님들은 전부 교장선생님 같은 얼굴을 하고 계셨는데 말이다. 쌓여 있는 기와 위에도 작은 부처님들이 앉아 계시고, 여기저기에는 사람들이 만든 돌탑이 있었다.
나는 어느 새 사람들의 소원이 적힌 예쁜 종이가 들어 있는 병들이 매달려 있는 곳에 도착했다. 나보다 조금 더 어린 것 같은 여자애 하나가 아빠 손을 잡고 소원을 병 속에 집어넣고 있었다. 여자애가 웃으며 아빠를 올려다보자, 아빠가 그 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두 사람이 가 버린 뒤에 가까이 가서 병 속을 들여다보았다. 사랑한다는 말도 적혀 있고, 보고 싶다는 말도 적혀 있고, 그리고 좋은 곳으로 가라는 말도 적혀 있었다. 아마 나처럼 엄마가 돌아가신 모양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다. 아프지 않으실 때에도, 그리고 아프실 때에도 웃고 계셨다. 할머니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가 불쌍하다고 하셨지만, 내 생각에 나는 불쌍한 아이가 아닌 것 같다. 엄마는 항상 웃고 계셨으니까 아마 하늘나라에 가서도 웃고 계실 것이다. 엄마가 슬프지 않으면 나도 슬프지 않다.
할머니가 나를 찾느라 두리번거리고 계셨다. 할머니는 또 많이 우신 모양이었다. 나뭇가지처럼 까맣고 가느다란 할머니의 몸이 겨울바람에 날려 갈 것 같이 약해 보였다. 할머니가 나를 끌어안으며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우리 손주, 우리 가엾은 현우 불쌍해서 어쩌누. 대체 어쩌누.”
나는 오늘에야말로 할머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할머니, 울지 마. 웃어야 엄마가 기뻐해.”
할머니의 등 뒤로 아까 보았던 누워 있는 부처님이 슬쩍 보였다. 부처님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월출산에 올 때부터 이상하긴 했다. ‘달이 떠오르는 산’이라길래 이름마냥 고요하고 아름다울줄 알았는데, 웬걸, 기암절벽에 바위 천지, 산세는 또 어찌나 험한지!
“이 산이 원래 이렇게 험한 거야, 아님 내가 가는 이 코스만 험한 거야?”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어 검색을 시작했다.
“월출산, 우리나라에서 풍수지리상으로 기세가 가장 센 산? 아, 내가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구만. 게다가 구름다리 코스가 가장 난코스? 아아악, 젠장!”
당장이라도 휴대전화를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따 아내와 통화를 해야 하니까. 싸우고 꼴 보기 싫어도, 집에는 같이 가야한다. 한 집에 사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이렇게 꼬일 줄 알았으면 아내와는 같이 안왔을텐데. 그는 지금 후회하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처음부터 월출산에 가는 걸 싫어했다. 이왕 여름휴가를 받아 쉴 거면 산 보다는 바다가 좋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가지도 않은 산악 캠핑장에 푹 빠져 있었다. 그의 아내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망할 리얼 버라이어티가 대한민국 남자들을 전부 된장 캠퍼로 만들어 놨어...’
게다가 전국의 술이란 술은 다 먹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인데, 하필 영암에는 그가 아직 섭렵하지 못한 술이 있었다. 그래서 목적지는 두말할 것도 없이 영월이 됐다. 도대체 그냥 막걸리도 아니고, 무화과 막걸리가 뭐길래!
남편의 소원대로, 그들은 월출산 캠핑장에서 무화과 막걸리를 마셨다. 막걸리는 생각보다 맛이 좋았다. 처음에는 툴툴거리던 아내도 한 사발, 두 사발 받아먹더니, 혼자 한 동이를 다 비웠다. 그렇게 둘이서 세 동이쯤 먹었을까? 혀가 살짝 꼬인 채 남편이 말했다.
“야, 너는 그렇게 오기 싫어하더니, 이렇게 맛나게 출을 처마시냐? 너 인제 내가 하는 말에 토 달지마 이 여편네야.”
“야, 너 지금 말하는 스타일이 왜 그 모양이야. 너 잊었어? 난 지금도 산이 싫어. 벌레는 왜이리 많고, 저 깎아지른 듯 한 산세는 뭔데? 네가 언제 내가 원하는 대로 말 들어준 적이나 있어? 내가 참아주고 사니까 이게 그걸 당연한 줄 알아. 뭐 그리고 술을 쳐 마셔? 그래, 나 아주 상스럽게 처마시고 있다. 너 때문에 열 받아서 술이 아주 그냥 술술 들어간다. 됐냐?”
사실 남편은 말을 입 밖으로 뱉는 순간부터 후회하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아, 입이 방정이다. 오늘 분위기잡고 첫째 만들려고 했는데, 이거 뭐 분위기고 뭐고, 내일 무사히 집에나 갈 수 있음 다행이게.’
결국 아내는 텐트에서, 그는 해먹에서 잤다. 2세 만들기는 생각조차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함께 나란히 오르기로 한 월출산을 따로 나섰다. 아내는 바람폭포 쪽으로, 남편은 구름다리 쪽으로.
월출산 캠핑장에서 구름다리까지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걸렸다. 그러나 구름다리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이 어마어마한 산새는 무엇인가; 한 시간 밖에 안 걸었는데도 다리에서 힘이 풀리고 있었다. 게다가 남들은 고어텍스 옷이며 등산용 스틱이며 만반의 준비를 하며 걷는데, 그의 무기는 달랑 등산화뿐이었다. 걷다가 벌써 생명의 위협을 몇 번이나 느꼈던가! 긴장감에 물을 마구 들이켰더니, 물도 벌써 다 떨어져가고 있었다.
구름다리는 정말 장관이었다. 밥로스 아저씨가 나이프로 휙휙 휘저어 그린 듯한 바위절벽 사이에 끝도 보이지 않게 긴 다리가 있었다. 어마어마한 공포가 밀려왔다. 한참동안 다리 입구에서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난간을 꼭 잡은 채 한 발 두 발 걸어갔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경치는커녕 눈을 어디에도 돌릴 수 없었다. 간신히 눈을 돌려 난간을 잡은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다, 그는 깜짝 놀랐다. 난간에는 매직으로 네 글자가 적혀있었다. ‘떨어져라.’
그는 꽁지에 모터가 달린 듯 건너편을 향해 걸어갔다. 차원이 다른 공포였다. 산의 기운이 짓누르기 전에 산과 산을 잇는 이 허공에서 도망가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민망할 정도로 빠르게 구름다리 건너편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전화기를 꺼냈다.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딸칵. 왜?”
“너 어디야, 바람폭포야?”
“아니, 나 천황봉 거의 다 왔는데? 이제 내려갈 거야. 끊어.”
“야야야야야! 너! 아니, 미안하다.”
“너 왜 그래, 약먹었어?”
아내의 목소리를 듣자 그는 오만생각이 떠올랐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순간에 떠오르는 건 역시 마누라밖에 없구나. 지가 아무리 기가 세고 바가지를 긁는들 그 기운이 월출산만큼 뻗치진 않으니. 적어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진 아니하잖나. 악처라도 처가 있는 게 낫다고, 감사하며 살자.
“아냐. 생각해보니까 그냥 미안해서. 나 인제 구름다리니까 조금만 기다려. 사랑한다.”
“놀고 있네... 빨리와. 투둑. 뚜.뚜.뚜.뚜...”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자 수정이가 오늘도 어김없이 동화책을 읽어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수정이가 골라온 책들은 오늘도 <눈의 여왕>이나 <플란다스의 개>, <어린 왕자> 같이 언젠가 가 볼 수 있을 것 같은 먼 나라의 이야기들이었다. 이야기의 굴곡에 따라 울고 웃던 수정이가 어느 새 잠이 들면 나는 이불을 꼭 덮어주고 조용히 방문을 닫으며 눈물을 훔쳤다.
수정이가 학교에 가지 못한 지도 어느 새 일 년이 넘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기 시작했으니, 또래 친구들도 없었다. 대신 아파줄 수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몇 차례나 수술을 반복해도 수정이의 몸 상태는 쉽게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수정이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갖고 싶은 것이든, 먹고 싶은 것이든 무리를 해서라도 다 사 주었다. 하지만 수정이의 표정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바깥을 돌아다녀 본 적이 없으니 점점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모양이었다. 수정이는 시들어가는 꽃처럼, 멍한 얼굴로 하루 종일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다 나아서 학교에도 가게 되고, 친구들도 사귀게 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어도 항상 묵묵부답이던 수정이가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은 동화책을 읽어주기 시작한 뒤부터였다. 눈의 여왕이 사는 얼음 궁전과 파트라슈가 뛰어 놀던 튤립이 만발한 들판, 어린 왕자가 도착했던 사막과 같은 곳에 가 보고 싶다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래 동화책을 읽어 줄 걸 그랬다고 농담을 하면서도 남편과 나는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몇 주 뒤 수정이는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큰 수술을 앞두고 있었고, 남편과 나는 지쳐 있는 수정이를 위해 나들이를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아픈 아이를 데리고 너무 먼 곳으로 갈 수도 없어서 고민 끝에 결정한 행선지는 대부도였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바다를 좋아할뿐더러, 대부도가 요 근래 관광 개발에 힘을 쏟고 있어 여러 가지 볼거리가 많이 생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수정이는 나들이를 가기로 한 날 아침에도 식사를 몽땅 토했지만, 좀 더 나으면 가자는 남편의 말에 주사를 맞을 때보다도 더 큰 목소리로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남편과 번갈아 가며 달래도 보고 혼내도 보고 한참 애를 썼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눈이 퉁퉁 부은 아이를 안아서 차에 태우고 대부도로 향했다.
바다에 들어가기도 이른 계절이라 가서 아무것도 못 하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마침 대부도에서는 튤립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섬에 웬 튤립이 있나 의아해하고 있었는데, 우리 가족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상상 이상이었다. 알록달록한 튤립을 지천으로 심고 풍차까지 세워 섬을 네덜란드의 전원 풍경처럼 꾸며 두었던 것이다. 조성된 지 얼마 안 된 테마파크인 모양이었다. 바닷바람에 오색 풍차와 바람개비가 돌아가고 있는 모습, 멀리 바다가 건너다보이는 넓은 갈대밭까지 발견한 수정이가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엄마, 이것 좀 봐요! 꼭 동화책 속에 들어온 것 같아!”
차로 이십 여 분 거리에는 유리섬이 있다고 했다. 유리섬. 유리로 만든 섬. 그 이름을 듣자마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수정이는 잠깐만 해변을 걷겠다며 미처 말리기도 전에 차를 뛰쳐나갔다.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딸아이가 마치 유리로 만든 성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남편과 나는 수정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꼭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