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로 편성된 조의 명단들이 발표되자 강의실이 크게 술렁였다. 사진과에서 가장 불편한 사이로 알려진 네 명이 같은 조가 된 것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넷의 중심에 서 있다고 알려진 것이 바로 나였다.
과제는 한 가지 풍경을 두고 네 가지 관점에서의 사진을 찍어오라는 것이었다. 사진 찍을 장소를 정하기 위한 회의 시간이 주어졌는데, 첫 모임부터 삐걱거리게 생겼다고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짜증이 치밀어 올라 일어서려는데, 나머지 세 명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나를 붙잡았다.
모두에게는 안됐지만, 전혀 잘못 짚은 일이었다. 나와 인성이가 잠시 헤어질 위기에 처하기는 했었지만, 그것도 옛날 일이다. 나와 정현이, 인성이, 민수. 지금 우리 넷의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소문이 시작된 것은 인성이를 두고 내가 민수와 바람을 피운다는 데에서부터였다. 이 사건의 진상은 인성이와 크게 싸우고 우울해하는 내게 민수가 술을 사 주었으며, 이 또한 인성이가 민수에게 중재를 부탁해서였다는 것이었다.
정현이와 나는 1년 전에 잠깐 사귀다 헤어졌으나 지금은 서로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 게다가 정현이와 인성이, 민수는 과에서 가장 친한 친구였다. 사람들은 우리가 <사랑과 전쟁>에나 나올 법한 사랑싸움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내가 과거의 남자친구, 현재의 남자친구에 이어 미래의 남자친구까지 한 번에 끼고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막상 우리 네 사람은 앞으로 나설 용기도 없이 뒷말을 일삼는 사람들을 상대해서 뭐하냐는 공통된 생각이었다. 일단은 우리 자신에게 전혀 찔리는 부분이 없어 당당할 수 있었고, 일일이 해명하기도 귀찮은 일이었다.
당연히 촬영지를 정하는 문제도 일사천리로 해결되었다. 내가 연천의 숨은 명소인 재인폭포를 추천했고, 모두가 내 안목을 믿는다며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남들에 비해 유달리 짧았던 회의 시간이 또 오해를 불러오겠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회의 시간을 늘리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역시 장소 선정은 미경이가 최고지.”
재인폭포 앞에 선 우리는 폭포의 절경에 한참 동안 할 말을 잃었다. 높이가 거의 삼십 미터에 이르는 스카이워크 전망대 위에서 폭포를 내려다보니 아찔하기까지 했다. 산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그 구멍으로 누군가 한 줄기 물을 흘려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계곡이라 하면 보통 아주 맑거나, 아니면 깊이 때문에 청록색을 띠고 있는 물을 상상하는데 이곳의 물은 녹색이라기보다는 하늘색에 가까웠다. 굳이 비유하자면 도자 박물관에나 놓여 있을 법한 고운 청자의 빛깔이었다. 평지가 내려앉아 생긴 협곡이라 그런지 폭포를 감싼 절벽이 주상절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는 네 가지 시선을 폭포와 폭포 위의 용소, 폭포 아래의 못, 그리고 주상절리로 나누었다. 두 명이 위에서, 두 명이 아래에서 찍기로 결정이 나자 정현이와 민수는 한사코 고집을 부려 나와 인성이를 폭포 아래로 내려 보낸다.
“아까 들어오는 길에 있던 안내판 봤어?”
내가 고개를 젓자 인성이가 안내판에 적혀 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재인폭포에 대한 전설은 두 가지로 전해진다. 첫째, 재인의 아내를 탐했던 원님이 재주를 부리게 하여 재인을 죽인 이야기. 둘째, 재인이 남의 아내를 탐하여 재주를 부리다 죽은 이야기. 전설과 문헌이 서로 달라 두 가지를 모두 기록해 두었단다. 어느 쪽이 맞는 이야기일까에 대해 잠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곧 웃으며 그만두었다.
“시선의 차이지, 뭐.”
문밖에서 부는 바람소리에 촛대의 불이 미묘하게 흔들렸습니다. 달빛이 환하게 현의 방을 비추는 야심한 시각이었지요.
“무릇 양반이라면 돈은 손으로 만지지 말고 쌀값을 직접 물어보아도 안 된다. 아무리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며 밥을 먹을 때에는 국부터 먹어서도 아니 된다.”
다리가 저려오고 눈꺼풀이 점점 감겨왔지만 아버지를 실망시킬 수 없었던 현은 꿋꿋하게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하회마을에서 현의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현의 집안은 대대로 훌륭한 벼슬자리에 오른 유서 깊은 가문이었습니다. 그런 가문의 외아들인 현은 아버지와 가문의 대를 이을 귀한 증손인 것이지요.
아버지께서 침소에 드셨으나 현은 달빛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현은 이러한 양반들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덕목들에 대한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대한 답답함과 양반과 상민의 신분차이에 대한 위선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였습니다. 현의 집에서 머슴으로 지내는 만복이가 살금살금 대문으로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독 야심한 밤 잦은 외출이 의심스럽던 만복이었습니다. 마음도 심란하고 마침 잠도 쉬이 오지 않던 현은 만복이의 뒤를 쫒기 시작하였지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향하던 만복이의 발걸음이 멈추는 곳에 다다랐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일곱 명 정도의 동네 머슴들이 모여 있었고 각자 하나같이 희한한 모양의 탈을 쓰고는 중얼중얼 말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습니다.
“이보게 선비, 나는 사대부 집안의 뼈대 있는 양반이라오.”
“이보게 양반, 나는 오대부 육대부 집안의 뼈대 있는 선비라오.”
가만히 들어보니 양반과 선비들을 비꼬는 식의 놀이마당 인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재미있는 모양의 탈을 쓰고 있었지요.
마을의 머슴들이 모여 하나같이 양반과 파계승, 선비들을 비웃고 비꼬는 내용의 이야기들이 흘러나온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눈으로 본 것에 대한 충격과 거기에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만복이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란 현은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잠자리에 누웠으나 아까의 탈놀이가 잊히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심장이 두근거리고 정신이 아득했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던 현은 짙은 어둠이 내려앉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만복이는 어김없이 대문으로 향하고 종종거리는 발걸음을 재촉하였지요. 그 뒤를 조용히 밟던 현은 무리들이 있는 곳으로 다다랐고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만복이는 자신들이 양반을 희롱하였다는 사실이 들켜 엄벌을 받을까 두려웠고 무리들도 자신들이 모시는 양반에 알려질까 두려워 벌벌 떨었습니다. 그런데 현은 뜻밖의 제안을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이 무리에 끼워주시오. 탈을 쓰고 놀이를 한다면 큰 무리는 없을 것이오.”
어리둥절한 무리의 사람들과 만복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현은 단오하게 무리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자신이 양반에 대한 위선과 회의감을 털어놓고 이 무리들에게 양반에 대한 허와 실을 말하며 양반인 자신이 직접 탈놀이를 하여 더욱 사실적인 탈놀이가 될 것이라며 끊임없이 설득하고 또 설득하였습니다. 끝내 무리는 현을 받아들이게 되고 현의 얼굴에 맞는 양반탈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매일 무리들과 연습을 하던 현은 본격적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몇 회씩 놀이가 거듭될수록 현의 자신감은 날로 늘어나고 놀이판도 더욱 신명나고 재미있어 상민들 사이에 큰 입소문을 타면서 저잣거리의 큰 행사로 자리가 잡혔습니다.
처음에는 장단에 맞추어 어깨춤만 추며 몇 마디 대사로만 이루어졌던 탈놀이가 악기들이 늘어나 더욱 신명나고 대사들은 더욱 신랄해지며 구경꾼들도 함께 참여하는 큰 놀이마당으로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놀이판이 점점 커지면서 양반들의 귀에도 하나 둘씩 탈놀이에 대한 이야기가 돌기 시작하였습니다. 양반들은 치욕스럽고 화가 치밀었지만 하나둘 씩 그 내용이 궁금하긴 하였습니다. 이로써 양반들은 서로 쉬쉬하며 탈놀이를 보기위해 저잣거리로 나가는 양반들도 생겨나게 되고, 현은 무리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지요. 다른 마을에서도 소문을 듣고 탈놀이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늘게 되고 지금도 양반탈을 쓴 현은 신명나는 놀음 한 판을 벌이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에헴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마을의 꼬마들이 빙 둘러앉았습니다. 올해 102세로 마을의 가장 장수하신 에헴 할아버지는 늘 아이들을 보면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하시는 할아버지라 아이들이 할아버지를 부를 때 에헴 할아버지라고 부르곤 하지요. 오늘은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약수터 정자에서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실 모양입니다.
아이들은 이야기가 궁금하여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하고 몸을 할아버지 쪽으로 바짝 당겨 앉았습니다.
“에헴! 여기 약수터 보이지? 오늘은 이 약수터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이 약수터는 아주 오래되었지. 아마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 일게다. 이 약수는 지금보다 더 신비로운 물이었지. 바로 아무리 많은 사람이 마셔도 그 물이 마르지 않았단다. 그리고 이 물은 톡 쏘는 맛과 신비로운 효능이 있어 배가 아프고 몸이 아픈 환자가 먹으면 힘이 솟으며 병이 낫는다고 알려졌었지. 그래서 우리 마을로 이 약수를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단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해가 뉘엿뉘엿 질 때였지. 수상한 차림의 남자가 큰 배낭을 메고 우리 마을로 들어왔어. 그리고는 큰 통에 물을 마구잡이로 퍼 날랐지. 이 특별한 약수를 빼돌리려고 했던 모양이야. 그렇게 많은 물을 퍼 나른 남자가 다녀가자 아무리 마셔도 마르지 않던 약수터의 약수는 점점 말라가게 되었어. 물이 점점 말라가는 것을 안 마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더 많은 물을 차지하려고 싸우기 시작했단다.
그렇게 사이가 좋던 마을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고 거짓말을 하고 심할 때는 물을 빼앗기도 하였지. 쯧쯧쯧”“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에헴. 끝까지 들어 보아라. 그렇게 약수 때문에 싸움이 계속되자 보다 못한 마을의 산신령이 물의 맛과 효능을 싹 없애버렸단다. 그래서 아무리 물을 먹어도 병이 낫는 사람도 없고 물도 점점 흘러나오지 않았지. 사람들은 또다시 이게 다 다른 사람들의 욕심 때문이라고 하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생각을 하지 않았단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터줏대감으로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한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마을에 퍼지게 되었어. 사람들은 그제야 약수 때문에 싸운 것을 후회하고 반성했지. 그러면서 자신이 예전에 받아두고 얼마 남지 않은 약수를 한 바가지씩 할아버지네 집으로 가져왔어.
그렇게 한 바가지씩 모은 약수를 가지고 몸에 좋은 토종닭을 잡아 닭백숙을 푹 고아 할아버지께 드렸지. 그러자 할아버지의 병은 씻은 듯이 낫게 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건강해지셔서 매우 기뻐했단다. 할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한 바가지씩 약수를 모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기특하게 여긴 산신령을 달기약수터의 효능을 다시 되살리고 그 옆에 또 다른 약수터를 만들어 많은 사람이 물을 마시고 건강해지기를 바랐단다.”
에헴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은 한 명씩 약수를 마셔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너나 할 것 없이 팔을 들어 힘이 불끈불끈 솟는다고 하였지요.
아이들은 에헴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물을 마시니 마을의 약수에 대한 자부심이 생겨났지요. 그런데 이야기 속 닭백숙을 먹고 건강을 되찾은 할아버지가 에헴 할아버지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른 채 각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딸애가 유치원에서 신선이라는 단어를 듣고 왔는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신선이 뭐냐고 묻는다. 분명 유치원선생님에게도 똑 같이 신선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테고 선생님께서는 다정한 목소리로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을 텐데 이 녀석은 내게 꼭 되묻는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하고는 마치 처음 듣는 다는 듯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모습에 최대한 친절히 대답해주려고 한다.
“신선은 말이야. 산신령알지? 그런 것처럼 상상 속 인물이야. 도를 닦으면서 인간 세계에서 유유자적하며….”
아이에게 말을 해주면서도 아차 싶었다. 아이는 유유자적이 뭐야? 도를 닦는 게 뭐야? 하며 이맘때 쯤 아이들이 그렇듯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로 퍼부어 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이는 어쩐지 곰곰이 생각에 빠진 듯했다.
“빈이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음, 신선은 왠지 좋은 것 같아서.”
역시 어린아이라도 감은 있는 듯했다.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 하는 삶만큼 매력적인 삶이 없다는 것을 그 짧은 이야기 속에서 캐치해 낸 듯했다.
“응, 빈이 말이 맞아. 신선은 아주 경치가 좋은 곳에서 자연과 어울리며 살아가는 것이란다. 그래서 아주 경치가 멋진 곳에는 신선이 노닐다 간 곳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지.”
아이는 반은 알고 반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에게 신선이니 유유자적 하는 삶이니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나니 퇴근 후 유치원에서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넥타이도 제대로 풀지 못하고 앉아있는 신세가 어쩐지 처량해졌다. 풍류를 즐기며 유유자적하는 삶을 크게 동경하며 사는 것은 아니었지만 쉬는 것을 마다할 사람 없고 노는 것을 싫어할 사람도 없었다. 때마침 아내도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아이의 볼에 입을 맞추고는 아이에게 오늘 하루에 대해 물었다. 아이는 당연히 엄마에게도 처음 듣는 것처럼 신선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나와 똑같거나 비슷한 이야기를 하겠지라며 넥타이를 푸는데 아내의 입에서는 뜻밖의 이야기가 나왔다.
“빈이 저번에 아빠 엄마랑 무진정 갔다 온 거 기억나? 거기가 신선이 놀던 곳처럼 아름답다고 했었는데.”
“아! 맞아. 엄마랑 아빠랑 거기에서 사진 많이 찍었지!”
역시 엄마는 위대했다. 나는 아이의 눈높이는 고려하지 않은 백과사전같은 말만 늘어놓았는데 아내는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며 아이의 이해를 도왔다.
“응, 그러고 보니 지금쯤 무진정에 꽃도 피고 녹음이 푸르러 더없이 예쁘겠다. 봄은 이래서 좋아. 발길 닿는 곳 어디든 예쁘고 멋있잖아. 그래서 말인데 여보, 이번주 주말에 무진정 다녀올까? 저번에 갔을 때는 사람도 너무 많고 해서 제대로 만끽하지 못한 것 같아.”
이번주 주말이면 사회인 야구단에서 중요한 야구시합이 있는 날인데 차마 아내와 아이의 눈빛을 똑바로 보고 안 된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내는 내 대답도 마저 듣지 않은 채 벌써 룰루랄라였다.
어쩔 수 없이 야구단의 중요 경기에 참석 할 수 없다는 비보를 알린 채 아내와 아이의 손을 잡고 무진정으로 달렸다.
와아. 아내와 아이의 입에서는 동시에 감탄이 흘러나왔다. 아름다운 연못에 소박하게 자리한 정자가 기품 있게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이야. 무진정 무진장 아름답네.”
아내는 어쩐지 썰렁한 농담까지 곁들였다. 사실 주말을 손꼽아 기다린 야구 시합을 제쳐두고 온 것이라 입이 삐죽 나와 있던 차인데 무진정의 멋들어진 경치와 아내와 아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정말로 신선이 풍류를 즐기다 간 것처럼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는 무진정 앞에 서니 신선까지는 아니더라도 조선 시대 문신 정도는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빠, 아빠가 신선 같아.”
빈이는 저 멀리서 달려오며 나보고 신선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순간 그렇게 늙어보이나 라는 생각이 들다가 아이의 함박웃음에 나도 따라 웃으며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무진정 무진장 아름답다 정말.”
아내와 나는 오랜 시간동안 한 곳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수산시장의 하루가 시작된다. 얼음을 나르며 생선들에게 오늘 하루도 잘 부탁한다는 말을 건넨다. 수산시장만의 비릿한 냄새가 이제는 익숙한 사람들은 손에 물이 안 묻는 날이 없다. 겨울이면 옷을 겹겹이 껴입어봐도 고무장갑 사이로 들어오는 냉기 때문에 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한두 번이 아니다.
가지런히 정돈된 생선들과 횟감을 둘러보는 사람들 사이로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오늘 횟감 좋아요~ 사장님 한번 둘러보고 가셔.”
준영은 멀리서 엄마가 장사를 하시는 걸 보고만 있다. 손님이 엄마의 손을 냅다 뿌리치고 나서야 엄마에게 슬며시 다가갔다.
“여긴 또 뭐 하러 와. 공부하라니까. 이 좋은 옷에 비린내 배겠다.”
“오늘 장사 많이 했어? 추운데 얼른 접고 같이 들어가자.”
“무슨 소리, 너는 얼른 공부하고 나는 얼른 장사하고 그게 우리가 할 일이야. 그만 가봐. 엄마 일 해야 해.”
준영은 엄마를 주려고 가져온 손난로를 채 건네지도 못하고 돌아섰다. 준영은 노량진에서 고시공부를 하고 있다. 이따금씩 엄마를 보러 수산시장에 오면 엄마는 옷에 냄새 밴다며 한사코 돌아가라고만 한다. 생선박스나 얼음은 덩치가 큰 장정들도 혼자 옮기가 힘든데 엄마는 번쩍번쩍 잘도 든다. 여자는 약하나 엄마는 강하다는 말이 이런데서 나오는가 싶다.
엄마가 내색은 안 해도 내가 수산시장에 가면 옆 상회 아주머니들께 장차 나랏일을 할 우리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이따금씩 공부하는 것이 지겨워 ‘노량진’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치열하게 공부하는 사람들과 더 치열하게 생선을 파는 사람들. 어쩐지 엄마와 준영이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엄마에게 손난로를 건네주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는지 엄마는 그날 심한 열감기에 걸리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일을 나가시겠다며 완고하게 고집을 부리시는 통에 하는 수 없이 엄마를 모시고 시장으로 나갔다.
“너는 이제 올라가봐. 들어오지 말고.”
“오늘은 제가 도울게요. 엄마는 병원 다녀오세요.”
“병원은 무슨, 감기 가지고. 여기만 오면 다 낫는다. 여기가 엄마한테는 병원이다.”
말은 그렇게 해도 엄마는 내심 내 손을 뿌리치지는 않으셨다. 오늘 하루는 공부 말고 엄마를 돕기로 하고 방수 앞치마에 장화, 고무장갑까지 끼며 생선들을 정리했다. 생선 종류가 하도 많아 어떤 게 어떤 것인지 듣고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오늘 생선 정말 싱싱해요. 어찌나 싱싱한지 펄떡거리는 거 잡다가 손목 부러질 뻔 했다니까요!”
“허허, 젊은 청년이 말도 잘하네. 키로에 얼마라고?”
“헤헤, 3만원만 주세요. 큰놈으로 골라 드릴 테니까 어서요.”
준영이 손님을 끌어오면 엄마가 회를 떴다. 엄마는 그 와중에도 손님에게 장차 나랏일을 할 사람이 골라준 생선이라며 쓸데없는 생색을 내셨다. 엄마는 빨간 코끝에 하얀 콧물이 맺힌 줄도 모른 채 생선 내장을 발라냈다.
잠시 손님이 뜸했다.
“엄마는 여기 이 냄새 그리고 생선 지겹지도 않아?”
엄마는 잠시 손난로를 만지작거리시더니 아니 라고 짧게 대답하셨다.
“나는 가끔, 아주 가끔 이 노량진이 지긋지긋해서 나가고 싶은 적도 있었는데. 엄마는 없다고?”
“지긋지긋 하지. 나라고 왜 아니겠어. 그래도 여기만큼 활기 넘치고 싱싱한 곳이 없어. 제철이면 제철 맞은 생선들이 파닥이고, 엄마는 이 비린내 흉이라고 생각 안 해. 나한테 주는 훈장이지 훈장.”
“근데 왜 나는 옷에 비린내 나니까 못 오게 해?”
“그게 너랑 나랑 같은가. 엄마는 여기가 일터고 너는 일터가 따로 있지 있으니까 그렇지. 그나저나 오늘 엄마 땜에 공부 하나도 못해서 어쩌냐. 곧 시험이라며.”
“하루 안했다고 떨어지는 실력이면 시험 봐도 그만이야. 오늘 공부보다 더 값진 공부 했는데 뭐.”
엄마는 껄껄 웃으셨다. 모처럼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가슴 한 편이 뭉클했다.
비린내 가득하지만 싱싱함과 마주한 이곳. 노량진. 우리 모자에게 노량진은 그런 곳이다.
오랜만에 홀로 떠나는 배낭여행이었다. KTX를 타고 서울역에서 두 시간 사십 분. 부산이라는 도시는 언제 와도 참 묘하다.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들고, 목에는 DSLR 카메라를 메고 있는 내 모습은 자갈치 시장에서 이미 멋쩍게 느껴졌기에, 이번에는 휴대 전화와 카메라를 배낭에 집어넣은 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산에 올 때마다 들러 보자고 다짐했었는데, 해수욕장에서 놀다가 돼지국밥이나 밀면을 먹는 게 목적인 일행들의 반대에 부딪혀 번번이 무산되었던 발걸음이었다. 번화한 거리 너머로 ‘보수동 책방 골목’이라는 기다란 간판과 함께 양 팔로 책을 한 아름 들고 있는 남자의 황동상이 보였다. 자갈치 시장에서 걸어서 십여 분. 드디어, 나는 아날로그의 골목에 들어섰다.
사진을 취미로 삼은 지도 십 년 쯤 된 지금, 나날이 놀라운 성능의 카메라들이 출시되고 있는 가운데서 나는 구형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하나 구입했다. 옆으로 길쭉한 직사각형의 이 폴라로이드는 흑백으로 된 사진을 찍어낸다. 포토샵까지 쓸 필요도 없이 인터넷 사진첩의 보정 버튼 하나만 누르면 사진을 흑백으로 바꿀 수 있는 시대에 쓸데없이 비싼 돈을 주고 사고 있다고 아내도 친구들도 바보 취급을 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몇 년 전부터 나는 난데없는 향수병을 앓고 있었다. <써니>나 <건축학개론>, <응답하라 1997> 같이 복고를 코드로 한 콘텐츠들이 유행을 타기 시작해서였을까. 갑자기 어렸을 때 살던 동네가 보고 싶어 수십 년 만에 차를 몰아갔더니, 그곳에는 으리으리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었다.
아, 그때 내가 얼마나 후회를 했던가! 칠이 다 벗겨진 초등학교 정문이나 구슬과 딱지, 프라모델까지 팔던 문방구 같은 것들은 이미 세월의 흐름 속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세월이 지나면 모두 자연스레 변해가기 마련인 것을, 내 추억을 돌려 달라 누구에게 하소연을 할 수도 없었다. 너무 늦게 과거를 돌아보려 했다는 후회와 함께 아날로그에 대한 한층 더 큰 그리움이 몰려 왔다.
“엄마, 이것 봐요! 영심이!”
낯익은 이름에 뒤를 돌아보니 여대생으로 보이는 아가씨 하나가 만화책 한 권을 가리키며 신기해하고 있었다. <포켓몬스터> 세대인 줄로만 알았더니 우리 세대에나 유행하던 <영심이>도 알고 있나보다. ‘하나면 하나지 둘이겠느냐’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모녀가 사라진 뒤, 나는 그 여대생이 가리켰던 <영심이> 만화책을 집어 들었다.
부모님들 몰래 드나드는 학생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기에 시장골목 안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던 만화 책방. 나는 매일 방과 후면 그곳에서 퀴퀴한 남자 애들과 몰려 앉아 있었다. <마징가 제트>나 <쿤타맨>같은 만화책을 읽으면 나도 정의의 사도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것이 어느 새 삼십 여 년 전의 일이 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지금 내 손에 들린 이 <영심이>는 어느 구석에 숨어 세월을 품고 기다렸던 것일까. 어딜 봐도 빳빳하다고는 해 줄 수 없는 낡은 종이에서 나는 젖은 나무 같은 냄새에 마음이 편안해져왔다. 책방 지하에 있는 북 카페에 앉아 <영심이>를 뒤적이다가 그만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추억이 그리도 반가웠는지, 꿈속에는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왔다. 찐 옥수수가 든 바구니를 한 쪽 옆구리에 든 어머니가 땜방 자국이 있는 내 까까머리를 연신 쓰다듬으셨다. 치직거리는 라디오 소리를 들으며 마루에 뒹굴다가, 나는 또 잠이 든다. 그리고 깨어보니 다시 북 카페 안이었다.
<80일 간의 세계일주>, <운수 좋은 날>, <달과 6펜스>와 같은 우리 세대의 필독서들이 새겨진 돌바닥을 밟다 보니 <마징가 제트>가 그려진 빨간 가방이 놓인 집도 나왔다. 하염없이 걷다가, 갑자기 정신이 든 사람처럼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영심이>를 샀다.
책방 골목을 떠나기 전, 나는 이 향기로운 골목의 사진을 남기려 DSLR을 꺼내다가 고개를 저었다. 선명하고 화려한 것은 이 골목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이 골목을 담기 위해 내가 선택한 것은 조리개도, 촬영 모드 설정 기능도 없는 그 흑백 폴라로이드였다. 하얀 필름 종이에 풍경이 새겨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삼십 년 전의 어머니와 함께 걷던 바로 그 골목이 환상처럼 새겨지는 그런 상상을 했었다.
또 한숨이다.
“내가 몇 번을 말해! 양말 거꾸로 벗어 놓지 말고, 한 번 입은 옷은 옷장에 넣어두지 말라고 한 말 또 까먹었어요?”
“그래. 그러니까 당신이 하라고 당신이.”
“내가 언제까지 당신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어야 되는데. 당신 정말 나 없어도 이럴 거냐고요!”
아내는 눈물 섞인 소리를 내뱉었다.
“없긴 누가 없다 그래. 그런 쓸데없는 소리 마.”
아내에 비해 꽤 담담한 어투다. 남자의 목과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으나 아내가 눈치 채기엔 남자의 말투가 너무 무심했다.
남자의 사전엔 책임감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학교에서도 반장은커녕 기준도 제대로 외치지 못하던 남자였다. 심지어 그는 나라와 국민들의 안위조차 자신의 가녀린 두 어깨에 짊어지는 것이 무거워 군대도 가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도 아내와 노모가 있다. 말하자면 그는 가장인 셈이었다. 부양해야할 가족. 남자가 생각하는 그 책임감이라는 것이 남자의 어깨에 잔뜩 얹혀 있는 것이다. 그는 아내에게 나쁜 남편이었다. 아내가 아프기 전까지. 도무지 한 회사에 정착해서 다닐 생각도 못하던 남자를 아내는 조금도 채근하지 않았다. 그런 아내에게 남들은 저러다 화병에 걸려 제명에 못 죽을 거라고 했다. 말이 씨가 됐을까. 아내는 화병은 아니었지만 의사에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죄가 있다면 무책임한 남편을 방관한 죄일 것이다.
아내는 병원에 다녀온 뒤부터 남편에게 평소에 하지 않던 잔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아마 자기 없이 남편 혼자 스스로 살아가는 삶을 익혀두게 할 작정이었을 것이다. 남편은 그런 아내에게 신경질을 부렸고 심지어는 아내의 짐을 싸 내보내려고 아내의 서랍을 뒤졌다. 그러다 발견한 약봉지와 진단서. 남자는 그날로 집을 나갔다.
남자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남자가 집을 나간 후로부터 보름쯤 지난 후였다. 남자는 그저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을 할뿐 다른 말이 없었다.
남자는 전국 방방곡곡 아내의 병에 좋다는 약을 수소문하며 찾아 다녔다. 전국에 유명한 의원들을 찾아가 아내의 진단서를 보여주며 고칠 수 있겠냐고 따져 묻듯이 소리를 지르기도 벌써 보름하고도 닷새가 넘어섰다.
남자는 중얼거리듯 조금만 기다려 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남자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도착한 곳은 산청. 남자는 어렴풋이 산청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아내가 드라마를 볼 때였나 그럴 것이다.
남자는 몸에 좋다는 약초들을 찾아다니느라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남자는 간만에 어느 선술집 자그마한 방에 몸을 뉘었다.
숨을 쉴 때마다 앙상한 갈비뼈 윤곽이 드러났다 사라지곤 했다. 아내에게 이렇게 신경을 써 본적이 있을까. 그동안 아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생각했다.
피곤한 몸이라 금세 잠이올 줄 알았는데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문득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뚜르르, 한참을 신호가 흐르고 딸깍 소리가 났다.
“여보세요.”
“나야. 별 일없지?”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 없으니까 편하지 뭐, 안 그래? 양말 뒤집어 놓는 사람도 없고.”
“당신도 참. 그나저나 어디서 뭐 하고 다니는 거예요?”
“내일 올라가. 그 때까지만 기다려. 꼭.”
남자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어디 아프지는 않냐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럼 아내와 자신 모두가 말을 잇지 못할 것 같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내의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소와 다름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아내혼자 이별을 준비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왜 내게 이야기 하지 않았냐고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으나 남자는 여전히 무심한 어조로 기다리라는 말뿐이다.
통화를 하는 남자의 손에는 아내에게 가져다 줄 한 아름의 약초와 한약재가 쥐어져있었다.
“아리랑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막걸리 한 사발을 기분 좋게 들이키신 할머니께서 목청 높여 노래 한 가닥을 뽑으셨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부르시는 것도 아니고, 앉은 자리에서 울음을 울 듯 부르신다. 친척들의 분위기가 어느 새 숙연해 졌다.
애국가에 이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노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곳이야 널리고 널렸지만, 할머니께서 부르시는 아리랑만 들으면 나도 모르게 괜스레 코끝이 찡해진다.
“어이구, 우리 어머니. 또 이렇게 많이 취하셨네.”
아버지가 할머니를 이부자리로 부축해 가시는데, 어느 새 내 입에서도 아리랑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콧노래로 내 노래를 따라 부르시던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정말이지, 이게 딱 우리 어머니 노래지. 옛날에는 이 노래만 부르시면 눈물을 뚝뚝 흘리셨는데, 이제는 그러지는 않으시는구나.”
가락이 슬픈 노래이긴 했지만 눈물을 흘릴 정도는 아닌데, 왜 그런가 여쭈어 보았더니, 아버지가 아리랑고개에 얽힌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셨다. 외증조 할아버지, 그러니까 할머니의 아버지는 괴나리봇짐을 지고 성북구의 가파른 고개를 매일같이 넘어 다니던 분이었는데, 어느 겨울 날 고개 하나에서 기력이 다하셔서 쓰러지고 마셨다는 것이다. 추운 날에 몇 시간이나 고개에 쓰러진 채 겨울바람을 맞아야 했던 할아버지는 그대로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길을 가던 나는 ‘아리랑고개’라고 적힌 고개를 발견했다. 자주 가던 길이 아니라 평소보다 많이 두리번거리며 걸었기 때문일까. 서울 시내에 언덕길은 많고 많지만, 지명에 ‘고개’가 들어간 경우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추운 겨울 날 언덕에서 쓰러지고 마셨다는 우리 외증조 할아버지. 나는 노래 속의 이 고개를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오십 년 전, 아니, 백 년 전의 이 고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마 할아버지처럼 봇짐을 지고 수염을 기른 사람들이 흰 옷 차림으로 이 고개를 넘고 있지 않았을까.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자연스레 발걸음이 느려졌다. 조금 더 숙연하게, 조금 더 진지하게 넘어야 할 것 같은 고개였다.
“아리랑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나는 입 안으로 웅얼웅얼, 아리랑을 부르며 고개를 넘었다. 외증조 할아버지가 쓰러지신 채 가쁜 숨을 내쉬었던 고개도 어쩌면 이 고개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리랑을 처음 불렀던 사람이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을 목 놓아 부르며 주저앉았던 고개가 바로 이 고개일지도 모른다. 이 고개를 넘으며 생겨난 이야기들과, 이 고개 너머로 사라진 이야기들이 내 머릿속에서 차례차례 깜빡였다.
고개를 다 넘고 나서야 나중에 알게 된 일인데, 아리랑고개의 본래 이름은 정릉고개였다 한다. 나운규 감독이 영화 <아리랑>을 촬영한 장소라 아리랑고개라는 지명을 쓰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고 보니, 아리랑고개 마루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리랑 씨네 센터가 보였다. <쉬리>, <번지점프를 하다> 등의 우리나라의 옛날 영화와 함께 <사운드 오브 뮤직>, <벤허>와 같은 외국 고전 영화들의 감독과 주연배우를 새긴 동판이 거리 보도블록을 장식하고 있었다.
왠지 속은 것 같은 기분에 억울해 한 것도 잠시. 아리랑고개를 넘으며, 머릿속으로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아리랑을 들으며 이야기들을 얻었으니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그러니까 한 백 년 쯤 지나면 누군가가 이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는 내 모습을 상상할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