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아침부터 계획대로 되는 것이 없이 자꾸만 꼬여갔다. 일정이 꼬이니 괜스레 기분까지 꼬이는 것 같았다. 일정이 꼬이는 것이 남자친구인 민준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화살은 자꾸만 민준에게로 향했다.
“그러게 조금만 서두르자니까. 점심도 그냥 밖에서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 게 많은데 굳이 싸오겠다고 해서 이게 뭐냐?”
말이 조금 심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속에서 부글거리는 못된 세모마음이 가슴을 콕콕 찌르는 것같이 화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그렇게 서운하게 하냐. 밖에서 먹는 밥은 조미료 투성이라 맛없다며,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김밥도시락 만들었더니. 그만하자. 여기까지 나와서 이게 뭐하는 거야. 일단 레일바이크는 시간을 두 시간 반 정도 미뤘으니까 그 전에 뭐 할지나 좀 정해보자.”
모처럼 교외로 나온 나들이라 전날부터 계획을 짜며 알콩달콩하던 둘이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서로 입이 삐죽 나와 멀찌감치 걷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그래도 일정의 하이라이트였던 레일바이크는 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민준에게 짜증을 낸 것이 미안했던 현지는 민준 쪽으로 가까이 걸으며 잠시 앉아 주변관광지를 검색해 보자고 했다.
“어! 여기 근처에 풀향기 허브나라 라는 데가 있는데? 사람들 올려놓은 사진보니까 꽤 아기자기 한 것이 멋지다. 다양한 체험들도 할 수 있대. 여기서 허브 구경 좀 하고 체험 하나 하면 시간 딱 맞겠다. 가볼래?”
역시나 민준은 꽤 괜찮은 남자친구다. 언제 그랬냐는 듯 방긋 웃으며 먼저 현지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민준은 꽤 괜찮은 물건을 싼값에 얻은 사람처럼 즐거워했다. 현지도 그런 민준의 모습에 기분이 풀려 민준이 말한 대로 풀향기 허브나라로 가보기로 했다.
입구는 생각했던 것 보다 아름다웠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라 햇빛도 적당히 비추었고 가까놓은 정원은 단정하게 예뻤다. 풍차며 바람개비가 어우러져 이색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허브나라는 생각했던 것 보다 더 괜찮았다. 정원에 놓인 갖가지 장식들은 동화속 세상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고 시간을 메우기 위해 급하게 찾아온 곳치고는 더 근사했다. 쭈뼛거리며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허브 구경하시게요? 모기 쫒는 허브부터 집중력을 높이는 허브까지 종류가 다양하답니다. 천천히 둘러보세요. 그리고 다양한 체험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으니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시고요.”
“아, 네. 허브 조금만 둘러보고 비누 만들기 체험을 해보려고요.”
허브 하나하나 마다 이름과 효능에 대한 설명이 짤막하게 나와 있어 둘러보는 재미가 있었다. 특히 전자파를 흡수한다는 천사의 눈물이나 돈이 많이 들어온다는 행운의 나무, 남천과 같은. 민준은 남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듯했다. 익히 들어 알고 있던 허브부터 처음 들어보는 신기한 허브들까지 그 종류도 다양했다.
다양한 허브 종류를 보고 비누 만들기 체험을 했다. 비누 원료에 천연 색소와 허브향을 넣고 귀여운 틀에 부운 뒤 굳혀주기만 하면 완성되는 것이라 어렵지도 않고 간단했다. 어쩐지 손에 허브향이 가득 배어있는 듯했다.
함께 만든 허브비누를 들고 레일바이크를 타러 향하는 길목에 어쩐지 자꾸만 미소가 번졌다.
“우리 오늘 일정은 다 꼬였는데 어쩐지 가끔은 이렇게 뜻하지 않은 여행도 재미있는 것 같아.”
“그러게.”
마주잡은 두 손에서는 은은한 허브향기 번져나갔고 여행의 막바지를 향해 가는 두 사람의 얼굴에서 행복함이 번져나갔다.
편안한 차림을 한 청년들이 모여 있고 그 속에는 유난히 흰 피부를 가진 민규가 눈에 띈다. 소풍이라도 가듯이 청년들은 삼삼오오 한껏 들뜬 표정을 하고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농활을 가는 길이다. 대학졸업을 위해 더 자세하게는 학점을 위해 떠나는 농촌봉사활동이다.
민규에게 시골이라는 공간은 이국의 어떤 사원만큼이나 낯선 공간이었다.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댁 모두 서울이었다. 그래도 민규는 할머니댁 간다는 말을 시골에 간다는 표현으로 쓰곤 했다. 다른 애들처럼.
도시에서만 자란, 민규와 친구들에게 농활은 그저 졸업장을 받기 위한 수단이었고 친구들과 떠나는 2박 3일 MT쯤으로 여겼다. 그저 적당히 물이나 주고 돌멩이나 고르다 오면 그뿐, 맑은 공기 마시며 힐링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버스에 오른 민규였다.
뻥 뚫린 고속도로에는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원활한 소통을 보였다. 그래서일까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김제. 내리자마자 코끝에 불어오는 풀냄새와 꽃향기가 느껴졌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가을에 황금빛을 띠며 자랄 벼를 위해 논에 물을 대고 잡초들을 뽑는 일이었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농활이었다. 쪼그려 앉아 몇 시간씩 고된 농사일을 하다 보니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일은 해도 해도 끝날 줄을 몰랐다. 하하 호호 웃고 떠들던 청년들은 점점 말수가 줄었고 긴 한숨 소리만 정적을 메웠다.
때마침 반가운 새참시간. 학생들은 환호했고 민규도 뻣뻣해진 허리를 모처럼 폈다. 우두둑 소리가 났다. 새참은 파전에 막걸리였다. 민규가 무리의 끄트머리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파전을 먹었고 이제야 시골에 대한 환상과 현실의 중간을 만난 듯했다.
“힘들지?”
진 초록색 모자를 쓰신 할아버지께서 민규 옆자리에 앉으셨다. 아마 이장님 댁 할아버지이신 듯했다.
“아닙니다. 허허. 저희는 그래 봐야 이틀인데요. 뭐.”
민규는 저도 모르게 이틀이라는 시간을 단정 지었다. 이틀, 그 이상은 봉사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암묵적인 통보처럼 들리기도 했다.
“젊은이들은 모를 거야. 쌀이 어떻게 나오는지. 교과서에서 배웠을지 모르겠지만…. 쌀 한 톨 귀한 줄 알아야 해. 요즘은 산업이다 공업이다 성공의 잣대가 최첨단으로 흐르고 있지만 그 뿌리는 농사다 이거지. 허허”
할아버지는 젊은이들을 앉혀놓고 괜한 잔소리가 아닌가 싶어 끝에 웃음을 흘렸다.
쌀이 어떻게 출하되는지는 민규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할아버지 말대로 민규는 교과서에서 모내기부터 추수까지 나름대로 자세하게 쓰여 있었으니까.
그런데 교과서에는 벼가 쌀알이 되기까지 농민들의 이야기는 한 글자도 언급되지 않았음을 안다.
“우리나라가 농경사회가 아니겠어. 한국인은 밥심으로 사는 거지. 밥을 먹어야 힘이 나는 거야. 알지? 옛날에는 그저 한해 농사만 잘되게 해달라고 빌었으니까. 바랄 것이 그뿐이었던 시절이 다 있었으니까.”
할아버지의 말씀에는 앞뒤 문맥이 어지럽게 섞여 있었으나 이해를 못 할 만큼은 아니었다.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해가 지니 금방 어두컴컴해졌다. 시골이라 그런지 8시만 되어도 새벽녘처럼 깜깜했다. 하늘에 떠 있는 별만이 환한 빛을 비출 뿐 서울에서 보던 화려한 불빛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오늘은 잠이 잘 올 것만 같았다. 피곤해서 그럴 것이다.
이틀뿐이라던 시간은 흘렀다.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에 오른 민규는 약간은 검게 그을었다. 건강해 보였다. 고속도로는 여전히 소통이 원활했다.
서울은 여전히 높고 화려한 건물들로 가득했고 번쩍이는 네온사인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8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민규는 갑자기 어지러웠다. 잠시 찾아온 현기증 정도로 여겼다.
3학년 첫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 새 여름이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시간이 금방 흐를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빠를 줄은 몰랐다. 이제는 정말 진로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텐데, 심리학도, 철학도, 경영학도, 심지어는 예술분야까지, 나는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막막한 마음에 일단 부모님과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공부부터 열심히 하려 했던 것이 오히려 결정을 미루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내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일이 어떻게 쉬울 수 있겠냐마는, 이대로 있다가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져 간다. 날씨가 더워지며 점점 머리에도 열이 올랐다.
며칠 전 밤을 새워 모의고사 준비를 하다 코피를 쏟고 만 이후로, 안 그래도 느긋하신 성품의 부모님은 딸 걱정에 어쩔 줄을 몰라 하시고 있다. 보약도 지어 오시고, 내가 좋아하는 케이크나 쿠키 종류를 사다 주시기도 하시지만 머리가 식지 않았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고민해 보라는 부모님의 말씀이 내게는 전혀 와 닿지 않는다. 부모님의 말씀대로 고민할 시간이 있으면 좋을 텐데 수능도, 대입도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수연아, 그러지 말고 이번 주말에 물놀이라도 가는 게 어때? 날씨도 많이 더워졌잖아. 엄마가 좋은 곳을 알고 있는데, 아마 수연이도 정말 좋아할 거야.”
“그래, 수연아. 네 엄마도 나도 정말 걱정이다. 더위도 식히고, 머리도 식혀보자.”
이쯤 되면 거절하는 것도 참 애매하다. 나는 마지못해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방으로 들어와 오답정리를 시작했다. 거실에서 부모님이 주말의 일정과 준비해야 할 물건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 내게는 이 생각뿐이었다.
물놀이를 간다고 해서 막연하게 바다나 강가를 상상했는데, 도착한 곳은 내 상상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계곡이긴 한데, 여기저기 예술작품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부모님이 돗자리를 펴시고 튜브에 바람을 불어넣는 동안 나는 정신없이 예술작품들을 구경했다. 물가에는 <돌꽃>이 피어 있었고, 안양 종합 운동장에서 옮겨왔다는 잔디밭에는 <잔디밭은 휴가 중>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안양에 ‘예술의 도시’라는 슬로건이 붙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독특한 공원이 조성되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물고기의 눈물이 호수로 떨어지다>라는 이름을 가진 분수를 지나 내 발걸음이 멈춘 곳은 <큐브>였다. 나는 이 두 개의 철제 상자 사이에 턱을 괴고 쪼그리고 앉았다. 두 개의 상자는 내가 선택해야 될 미래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감옥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한 가지 작품을 보고 미래와 감옥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단어가 떠오른 것이 한편으로는 서글프기도 했다.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는 두 개의 상자를 만들며 작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지금 미래를 선택한다고 한들, 나는 자유롭게 내 미래의 문을 여닫을 수 있을까.
문득, 내 자신이 내 미래에 자신을 가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개의 큐브 중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큐브 밖에 있는 내 자신이 내가 정말로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닐까.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맛있는 점심이 준비되어 있었다. 부모님과 나란히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불현듯 담임선생님께서 추천해주셨던 자유전공학부 제도가 떠올랐다. 학부로 대학에 입학해 다양한 학문을 접해본 뒤 2학년이 될 때 세부 전공을 선택하는 제도였다. 대학에 입학하면 또 취업 준비로 바빠질 텐데 괜히 소중한 일 년을 허비하는 것 같은 생각에 거절했었지만, 예술 공원을 한 바퀴 거닐며 갖가지 관점의 상상력을 접한 나는 내게 1년의 시간을 더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가운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있자니 머릿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양 옆에 앉으신 부모님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나, 생각보다 시간이 많은 것 같아요.”
물이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이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엔 언제나 이야기가 피어난다. 어느 나라든 강은 중요한 물류 운송의 수단이 되었고 강을 중심으로 사람들은 그 당시 수도인 한양으로 몰려들며 강 주변 나루에 상권을 만들게 된다.
마포나루는 조선의 시전 상인들이 물자를 교역하는 중요수단이었으며 조선의 모든 장사꾼들이 한번쯤 지나칠 수밖에 없는 공간이 되었다.
“주모, 여기 술상하나.”
“누군가 했더니 김씨구먼, 외상은 안 돼요. 오늘은 내 돈 받을 것이니 그리 아시오.”
“어허, 왜 그러오? 내 오늘은 돈 내고 먹는 것이니 걱정 말고 상이나 빨리 가져오란 말이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소? 오늘은 장사가 잘 되었나 보지요?”
“그럼, 잘 되고말고. 모처럼 장사수완이 좋았지. 암.”
당시 마포나루에는 여러 장사꾼들이 모여 상권을 이루었지만 그 중에서도 새우젓이 제일이었다. 당시 서울사람들은 겨울이 되기 전 김장을 담그기 위한 새우젓을 사러 모여들었고 마포나루에서 새우젓을 사가면 성공한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마포나루에는 새우젓의 짙은 향이 머물곤 했다.
김씨가 마포나루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것도 이 새우젓 때문이었다. 마포나루의 아지매들이라 하면 다들 김씨의 새우젓을 맛보고 사가기 위해 십리 밖까지 줄을 선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김씨의 장사수완은 날로 좋아졌다.
“어이, 자네 김씨 소식 들었는가?”
“들었지, 들었고말고. 그래서 사람팔자 한치 앞도 모르는 거라 그러지 않나. 김씨가 저리 성공할 줄 알았겠어?”
“누가 아니래? 비싼 비단 저고리 팔다 내 신세 다 가겠소. 나도 김씨한테 장사나 좀 배워볼까?”
“그러면 뭐하누, 아직 상투를 못 틀었는데.”
“아, 조선팔도 김씨 새우젓 장사 소식이 파다한데, 이제 예쁜 색시 고르는 일만 남았지 뭐요.”
주막을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김씨의 소식은 이리저리 퍼져갔다. 하지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처럼 김씨에게 시집을 오겠다는 처자들은 많았지만 김씨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선뜻 어떤 아낙과 혼인을 하겠다는 이야기가 나돌지는 않았다. 지나가는 이야기로는 마포나루에서 크게 어물전을 하는 거상의 여동생을 흠모하고 있고 그 처자도 김씨가 맘에 드는 모양이나 어물전 오씨가 김씨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만 들릴 뿐이었다.
김씨도 마포나루에서 크게 자리 잡은 사람이었지만 어물전 오씨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 오씨는 마포나루 상인 중 제일가는 장사꾼으로 마포나루 상인들을 움직이는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가진 선박도 여러척이었고 그의 말에 마포나루 상권이 들썩일 정도였다. 오씨도 김씨의 장사를 눈여겨보고 있었을 터, 침착하고 진중한 성격의 오씨는 아직 김씨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사실 오씨가 김씨를 탐탁지 않아 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김씨가 새우젓 장사를 하면서 상권을 확보하자 점점 오씨가 판매하는 어물전과 겹치는 품목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오씨에게는 단골손님들이 많았기에 큰 피해가 있지는 않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김씨는 무슨 수를 내어야 했다. 언제까지 오씨의 허락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김씨는 며칠 뒤 마포나루에서 큰 잔치가 열릴 것을 알고 그 때를 노리기로 했다. 오씨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마을의 큰 잔치가 열리고 마포나루에 모인 사람들은 거의 평소 때보다 곱절이나 많았다. 오늘 장사만 잘 하면 크게 한 몫 챙길 수 있었기 때문에 상인들도 좀처럼 바삐 몸을 움직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영문인지 시간이 지나도 김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오씨도 내심 김씨가 신경 쓰였는지 자꾸만 김씨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날이 점차 어두워지고 상인들이 한두 명씩 짐을 꾸리고 있을 때 김씨의 모습이 나타났다. 주막에서 속편하게 술을 마시고 있다는 것이다. 오씨가 김씨의 옆에 털썩 앉았다.
“아니, 김씨 자네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 모르고 여기 이렇게 태평하게 술을 마시고 있는가?”
“어물전 장사는 잘 되었나 모르겠습니다.”
“나야 늘 그렇지만 자네는 단골도 만들고 하기 좋은 날인데. 장사꾼 마음이 글러먹은 건가?”
“저를 기다리고 계셨소? 오늘 저는 돈보다 더 귀한 걸 얻었지요. 바로 형님의 장사를 눈여겨보았지요. 어떻게 장사를 하나, 단골은 누구인가.”
“아니 자네. 허허.”
그렇게 오씨는 김씨를 허락하게 되고 마포나루에는 크게 두 개의 상권으로 나뉘게 된다. 아직도 마포나루에는 김씨의 새우젓 냄새가 희미하게 풍긴다는 풍문이 들려온다.
오늘도 조용히 어머니가 작은 소반에 밥과 국, 반찬을 담아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민철의 점심을 주기 위함이었다. 몇 날 며칠 술에 취해 사네 못사네 하던 아들을 위해 조용한 걸음으로 콩나물국을 끓여온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이놈의 후레자식이라고 욕을 한 바가지 했을 아버지였지만 그저 잠잠히 신문만 바라보신다.
민철은 아버지와의 추억이 없다. 아버지가 소리 한번 크게 내실 때면 심장이 떨려 오줌을 지린 적도 있었다. 민철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다정하게 학교를 데려다 주는 친구의 아버지나 학원을 땡땡이쳐도 눈감아주고 함께 분식집에 들어가는 아버지. 민철에게 그런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옆집 아저씨라면 모를까.
그맘때 아이들이라면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놀이공원 가족사진. 민철에게는 사진 대신 민철이 그려놓은 그림 한 장뿐이었다. 그림에도 아버지는 없다. 엄마와 민철 그리고 남동생뿐.
설사 그 그림을 아버지가 보았다고 해도 민철이 아는 아버지라면 조금도 서운해하지 않았을 거다.
민철의 고등학교 친구들은 담배를 피웠다. 가끔 술도 마셨으나 다행히 민철에게 권하지는 않았다. 민철은 친구들이 소위 나쁜 짓을 할 때에도 아버지가 무서워 일탈을 꿈꿔본 적도 없다. 혹 꿈에 그런 장면이 나왔더라도 놀란 마음에 하루 종일 가시방석 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민철은 대학도 부모님이 원하시던 의대에 갔고 크게 속 한 번 썩힌 적이 없는 착한 아들이었다. 소위 말하는 엘리트코스를 밟아온 민철에게 큰 사건이 터졌다. 예기치 않게 찾아온 의료사고.
단순히 민철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환자 가족들도 크게 노여워하지 않았지만 민철은 혼란에 빠졌다. 처음으로 자신이 집도한 환자가 생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민철은 의사를 그만두어야 하나 생각할 정도로 혼란스러웠고 다시는 메스를 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고가 있고 난 뒤 민철은 일주일간 휴가를 냈다. 몇 날 며칠을 술로 지새우던 그에게 아버지가 조용히 다가갔다.
“옷 챙겨 입고 나와라.”
민철이 대답을 하기도전에 아버지는 조용히 낚시도구를 챙기셨다. 집 밖을 나가기도 싫었던 민철도 웬일인지 말없이 따라나섰다.
아버지가 낚시를 간다고 하면 어김없이 오던 곳이다. 그곳에서 둘은 하염없이 낚싯대만 바라보았다.
“미안하구나.”
낮은 음성으로 아버지가 말했다. 민철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며칠째 술만 퍼마셔서 그런지 헛것이 들리는 줄 알았다. 그래서 미쳐 대답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못 했다.
“많이 힘드냐. 자식 다 큰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 사람이 죽는다는 건 어쩔 수가 없는 거다. 그 사람 목숨 생각하면서 더 많은 사람 목숨을 위해 노력하면 되지 않겠냐.”
그렇게 무섭던 아버지가 왜 미안하다고 하셨을까. 그리고 아버지가 미안해해야 하는 건 무엇일까. 어릴 적 놀이동산에 한번 데려가지 않은 일일까 아니면 회초리 한 대 정도면 될 것을 열대를 때리고도 모자라 씩씩거린 일을 말하는 걸까.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는지 던져놓은 찌가 들썩거렸다. 하지만 아버지도 민철도 낚싯대를 건져 올리지 않았다. 다시금 찌가 잠잠해졌다. 미끼만 먹고 달아났다 보다.
아버지는 민철이 어렸을 적 이곳에 온 적이 있다고 했다. 민철이 기억을 못 하는 것일까. 아니면 민철의 기억 속에 있던 아버지와의 추억을 민철이 스스로 지운 것일까.
민철은 퉁퉁 부은 아버지의 손을 말없이 잡아주었다. 그리고는 이 시간을 잊지 않으려는 듯 낚시터를 빙 둘러볼 뿐이었다.
한참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친구가 어깨를 툭 쳤다.
“야, 너 또 그런 거 보고 있어?”
“아, 깜짝이야. 인기척 좀 내고 다녀라. 간 떨어질 뻔 했잖아. 난 이게 제일 재미있더라.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게 한이야, 정말.”
내가 보고 있던 건 다름 아닌 고래 사진이었다. 유치원 때부터 대학생이 된 지금까지, 나의 고래 사랑은 쭉 이어져 왔다. 그렇다고 해서 고래의 생태와 습성 같은 것들에 대해 학술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나는 그냥 고래의 사진을 보는 것이 좋았다.
아쿠아리움에 가면 헤엄치고 있는 돌고래들도 귀엽지만, 뼈 하나가 사람의 키만큼 큰 고래들이 더 멋지다. 포유류들 중 몸집이 가장 크다는 고래. 비행기나 배를 타고 바다 위를 지날 때면, 저 아래 고래 한 마리가 헤엄치고 있는 상상을 해 보곤 한다. 흰긴수염고래처럼 거대한 고래를 만난다면, 나는 아마 기뻐서 기절해버릴지도 모른다. 그보다 조금 작은 긴수염고래도 좋고, 점박이가 귀여운 범고래도 좋다. 다큐멘터리 채널에 고래가 나올 때마다,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고래나 공룡은 어렸을 때나 좋아하는 거 아니냐는 사람들이 많은데, 천만의 말씀이다. 이 거대한 생명체가 움직이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고래는 우리 학교 건물만큼이나 커다란 몸집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육중한 몸을 움직여 바다 속을 거니는 것이다. 학교가 물속을 헤엄치는 모습을 상상 해 보라! 놀랍지 않은가.
“나 어제 텔레비전 보는데 네가 정말 좋아할만한 곳 나오더라.”
자리에 앉자마자 고래 얘기를 시작하려는 내 말을 지영이가 뚝 끊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이미 고래변태라는 해괴한 별명을 얻은 나는 한 번 고래 얘기를 시작하면 멈출 줄을 몰랐다.
“울산에 장생포 고래 박물관이라는 데가 있는데, 거기 가면 4D 영상 체험도 할 수 있고 고래 뼈도 볼 수 있대. 왜, 그 공룡 전시회처럼.”
나는 지영이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지영이를 꼭 끌어안고 말았다. 당장 가자며 방방 뛰며 조르자, 참다못한 지영이가 내 머리에 꿀밤을 한 대 먹였다.
지체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 주말에 바로 친구를 끌고 울산까지 왔다.
“정말, 너한테 그런 말을 한 내가 바보지.”
투덜대는 지영이에게는 울산의 명물이라는 치즈 맛 고래 빵 열 개짜리 한 세트를 사 주었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내가 가끔 꾸는 고래 꿈처럼 달달한 맛이 났다.
고래 박물관답게 정원의 조형물들도 모두 고래 모양이어서 여기저기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눈이 동그래져서 정원을 둘러보고 있는데, 지영이가 고래 모양을 한 매표소 앞의 황동상에서 멈추어 섰다. 황동상은 돌고래와 입을 맞추고 있는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고래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인지, 아니면 소녀가 바다 속으로 들어간 것인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지영이가 무릎을 탁 쳤다,
“<돌고래의 요정 티코>! 우리 어렸을 때 방영됐던 만화!”
“그런데 만화에 나오는 건 돌고래가 아니라 범고래였어!”
내 말에 지영이가 깔깔 웃었다. 물론 나도 그 만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이십 대 중반 줄에 들어서고 있는 또래들 중, 이 만화를 한 번도 보지 않은 아이가 몇 명이나 될까. 만화는 범고래랑 친구인 소녀가 전설의 황금고래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내용이었는데, 어린 마음에 범고래와 함께 바다 속을 헤엄치는 주인공의 모습이 정말 멋져 보였다. 어쩌면 내가 고래를 좋아하게 된 것이 이 만화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결국 고래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래가 나오는 영화, 고래가 나오는 소설, 고래가 나오는 만화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는 끊이지가 않았다. 박물관에 들어서며,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 보았다.
소녀와 함께 헤엄치던 고래는 영화 <그랑 블루>의 포스터 속 달빛 아래에서 뛰어오르는 고래와도 닮았고, 황금고래는 <피노키오>에 나오는 거대한 고래와도 닮아 있었다. 사람들이 꿈꾸는 고래의 모습은, 딱 이 귀여운 고래 빵을 수만 배로 부풀려 놓은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까, 전 세계 사람들은 태어나서 한 번쯤, 고래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아빠, 이번 연말에는 어디 갈 거예요?”
딸의 머릿속에는 이미 가보고 싶은 곳이 가득한 것 같았지만, 이번에는 산통을 좀 깨야겠다. 나도 내년에는 꼭 내 시집을 내리라 결심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번에는 멀리 가지 말자. 연말 되면 카운트다운 하는 곳 있잖아. 거기 가서 타종식 한 번 보고 오는 건 어때? 아빠가 옛날에 가 봤는데, 가수들도 많이 오고 불꽃놀이도 해.”
싫다고 떼를 쓰면 어떡하나 하고 있었는데, 자기도 그런 의미 있는 곳에 가는 게 좋다고 하는 것을 보니, 딸도 이제 어린애는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내도 꼭 한 번 직접 타종식을 보고 싶었다며 한 수 거들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가족의 연말 맞이 여행, 아니 연말 맞이 나들이 장소가 결정되었다.
서울 시내 어디가 북적거리지 않겠냐마는, 내가 젊은 시절부터 가장 좋아하는 북적임이 있다. 바로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일대. 시간이 비는 오후면 교보문고에 들러 소설책을 한 권 읽고 가기도 하고, 아직 초등학생인 조카들을 데리고 세종대왕 동상과 그 아래 숨겨진 박물관을 견학하기도 했다.
몇 년 전, 수많은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모였던 촛불집회가 열렸던 곳도 바로 이 세종대왕 동상 앞이다. 그리고 대학생 시절 사회 운동을 하러 나왔을 때, 회사원들이 건물 창밖으로 두루마리 휴지를 던지며 무언의 응원을 보내던 장관도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졌었다. 젊은 시절 아내와 함께 거닐었던 경복궁이 동상 너머에 있었었으며, 청계천이 처음 조성되었을 때에도 이곳에서 시작되는 물길을 보러 왔었다.
그렇다. 내게 있어 광화문은, 내가 아는 수십 년의 서울의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다.
세 시간 쯤 여유를 두고 광화문에 도착했다. 몰려드는 인파를 한 번에 감당할 수 없어 타종식이 있기 얼마 전에는 교통을 통제하기 때문에 종각에 미리 가 봐야 소용이 없으니, 그 전에 가족들과 함께 이 광화문 일대의 문화를 느껴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은 또 크리스마스였기에, 거리는 아직 오색 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대부분의 상가들이 크리스마스와 연말 행사를 한 번에 챙길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야말로 ‘메리 크리스마스, 앤 해피 뉴 이어’였다.
나는 아내에게 근래에 크게 유행했던 로맨스 영화의 원작 소설 한 권을, 아내는 딸이 요새 푹 빠져 있는 외국 밴드의 앨범 한 장을, 딸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의 새로 나온 시집 한 권을 선물했다.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건실한 문화 향유층이야. 문화 시민이 달리 뭐 있겠어?”
딸이 건넨 말에 한바탕 웃으며 교보문고를 빠져나왔다. 청계 광장을 한 바퀴 둘러보러 왔는데, 청계천에도 언제나처럼 아름다운 조명들이 밝혀져 있었다.
“여기서 예전에 등 축제 정말 예뻤는데. 아빠가 매일 그렇게 광화문 노래를 불러도 안 와 닿더니, 그 때는 정말 세상에서 여기가 제일 아름다운 것 같았다니까요.”
그래, 문화라는 것이 말로 백 번 들어 무엇 하겠는가. 한 번 눈으로 보면 단숨에 반해버릴 것을. 내 철학을 늘어놓았다가는 면박을 면치 못할 것이기에, 마음속으로 할 말을 삼키며 웃었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제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여기저기서 전화를 걸어 ‘새해 복 많이 받아!’하는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무척이나 정겨워 보였다. 오죽하면 이 일대에서만 휴대전화가 반쯤 불통이 되었겠는가. 사람들의 입가에는 하나같이 함박웃음이 걸려 있었다.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신나게 소리를 지르다 보니 행사는 모두 끝났지만, 하늘에는 여전히 삼천 원짜리 싸구려 불꽃이 팡팡 터진다. 화약재가 그대로 떨어져 내리는데, 아무도 얼굴을 찌푸리거나 옷을 털어내지 않았다. 우리 가족도 노점상에서 파는 핫도그 하나씩을 들고, 축제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광화문을 걸었다. 평소에는 길거리 음식이라면 학을 떼는 아내도 오늘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지금 이곳이 바로 살아 숨 쉬는 서울 문화의 거리였다.
여자를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내고 남자는 한참을 그 시간에 멈춰있었다. 낮인지 밤인지 문 밖에 신문은 켜켜이 쌓여만 갔다. 술로 하루를 시작하고 또 술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남자가 마시는 것이 술인지 눈물인지 모를 만큼 슬픔을 잊기 위해 슬픔을 들이켰다. 얼마나 그 시간에 갇혀 있었던 건지 옆집 사는 사람이 쌓여있는 신문과 상해버린 우유들을 보고 초인종을 몇 번 누르고 간 적이 있다. 인기척을 낼 마음의 여유가 없던 남자는 그냥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렇게 몇 차례 경비 아저씨와 옆집 아주머니가 남자의 집 앞을 다녀간 뒤로 남자의 근황을 염려하는 사람은 없었다.
남자가 여자를 처음 본 것은 병원에서였다. 대학병원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동네에서는 꽤 큰 크기의 종합병원에 근무하던 여자의 직업은 간호사였다.
오토바이를 타다 균형을 잃고 넘어지면서 무릎을 크게 다친 남자는 여자가 근무하는 종합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실로 꿰맨 무릎에 소독을 하러 여자가 남자의 병실에 찾아왔다. 하얀 얼굴이라 그런지 단정한 간호사복이 잘 어울리는 여자는 순백의 천사처럼 보였다. 남자의 상처를 소독할 때면 마치 엄마처럼 상처부위를 호호 불어가며 소독약을 발랐다.
남자의 생활은 꽤 거칠었다. 어울리는 사람들은 험악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생활도 거의 해가 저문 밤에서야 시작되었다. 그런 그를 변화시킨 것도 여자였다. 사랑을 시작하게 되면서 거칠었던 생활도 점차 안정을 찾고 특별할 것 없이 잠잠하게 사랑을 키워나갔다.
그날도 어김없이 여자를 병원에 데려다 주는 길이었다. 매일같이 여자를 데려다 주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날따라 꺼림칙한 느낌에 잠깐 짬을 내어 여자를 데려다 주었던 것이다.
악. 짧은 비명과 함께 여자가 붉은 피를 쏟으며 자리에 쓰러졌다. 종종 어지럽다고 했었는데 그저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여긴 여자의 몸이 병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줄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렇게 여자는 남자의 곁을 떠났다.
실로 오랜만에 남자의 집 앞에 인기척이 들렸다. 남자는 여전히 문 밖을 신경 쓰지 않았으나 강제적으로 문을 따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철컥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집 주인의 허락도 없이 현관문은 스르륵하고 열렸다.
“아직도 이러고 있는 거야? 연락을 해도 답이 없더니만.”
남자의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친구의 방문 아니 무단침입이었다. 남자는 그 와중에 원래 집 주인 허락 없이 문 열어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가. 너랑 실랑이 할 힘도 없어.”
“어후, 술 냄새.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건데. 뭐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것 아니야. 밥이라도 챙겨먹어야지 이 술병들 좀 봐.”
“만사 다 귀찮으니까 가라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알아서 하긴, 너 이렇게 사는 거 하늘에서 보고 좋아 할 것 같냐? 이젠 충분해 너도 돌아와야지.”
남자의 어깨가 들썩였다. 소리도 채 새어나오지 않은 울음이었다. 아주 작은 흐느낌으로 남자는 슬픔을 삼켰다. 남자는 여자가 이렇게 아팠던 것이 모두 다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남자의 슬픔을 바라보던 친구는 남자를 억지로 차에 태웠다. 그리고는 회산백련지에 남자를 데려다 놓았다.
“자. 이제 네 모든 슬픔 여기다 다 남기고 가. 그분도 편하게 보내주고. 이젠 편하게 보내줄 때 된 것 같다.”
하얗게 핀 연꽃이 꼭 그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담담한 눈빛으로 넓게 펼쳐진 백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녀를 조금씩 놓았다.
넓게 펼쳐진 저수지에 유독 하얗게 핀 백련을 향해 마지막 인사를 했다. 이제는 놓아 보겠다고. 희고 아름다웠던 당신을 잊지는 않겠지만 더 이상 슬퍼하지 않겠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