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산사랑은 끝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산에 가지 말라는 것은 집에서 박제인형처럼 지내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바람만 쌩하고 불어도 엄마는 산이 위험하다며 아빠를 말리려 들었고 아빠는 좁은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 고양이처럼 또 산으로 가셨다.
엄마는 아빠가 아무래도 산에 우리가 모르는 좋은 것을 숨겨두었나 보다고 혀를 끌끌 찼지만 아빠가 왜 이토록 산에 매달리는지 알 수 있었다.
아빠는 종종 내게 할아버지 이야기를 해주셨다. 아빠가 어렸을 적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꽤 큰 인삼밭에서 농사를 지으셨다고 했다. 그런데 해마다 인삼도둑 때문에 골머리를 앓으셨다는 것이다. 애지중지하던 인삼을 어떤 놈이 훔쳐갔는지 걸리기만 하면 온몸을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줄 것이라며 씩씩대셨다고 했다. 그날 아침이 되었을 때도 어김없이 인삼 한 뿌리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꼭 한 뿌리씩만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마음먹은 할아버지는 그날 조그만 오두막에서 꼼짝없이 인삼도둑을 기다리고 있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져 가고 이상한 짐승의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던 할아버지는 무서움에 덜덜 떨면서도 인삼도둑을 잡고자 기다란 몽둥이를 들고 꼭꼭 숨어있었다. 그런데 그때 자박자박 거리는 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졸음이 확 깨었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자박자박 자박자박’ 사람의 소리인지 짐승의 소리인지 구별이 잘 되지 않았던 할아버지는 오두막에서 내려와 냅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진했다.
“잡았다 요놈!”
“악!”
깜깜한 어둠 속 사정없이 내리친 몽둥이를 온몸으로 받은 건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그렇게 잡고 싶었던 인삼도둑이 짐승도 아닌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들이었다니.
불빛을 비춰보니 아버지는 그만 정신을 잃었고 이마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에구머니나 하는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도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고 아버지를 둘러업고 집으로 돌아온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 자초지종을 물었다. 한참 뜸을 들인 아버지는 할아버지께 사실대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것아, 그게 얼마짜린데 도대체 그동안 그걸 다 어디에 빼돌린겨? 엉?”
“아부지, 잘못했어요. 빼돌리려고 빼돌린 것은 아니고 다 좋은 곳에 썼다니까요.”
“이놈이! 바른대로 말 못해? 몽둥이찜질 한 번 더 당해야 말할 것이여?”
“아아, 아부지. 실은 저 윗동네 민자네 어무니가 많이 아프다 해서 내 몇 개 가져다준 것밖에 없다니까요.”
“뭐? 민자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양반네 가져다 바쳤다 이 말이지?”
아버지는 예나 지금이나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나 보다. 사실 우리 엄마 이름이 민자고 엄마는 아빠의 첫사랑이다. 첫사랑을 위해 간 큰 도둑이 되기로 했던 어린 소년.
아빠가 요즘 산에 다니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바로 우리 할아버지 때문이다.
그 옛날 우리 아빠가 엄마를 위해 인삼도둑이 되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할아버지를 위한 거짓말도둑이 되기로 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도둑이 될 수 있다는 것. 아버지는 오늘도 함박웃음을 띠며 산으로 간다.
파란 눈에 오뚝한 코. 검은 머리에 흰 피부를 가진 내 이름은 레이나이다. 아빠는 한국계 독일 사람이었고 엄마는 한국 사람이다. 나는 아빠를 본 적은 없다. 그렇지만 아빠가 있다. 새아빠. 새아빠는 재미교포 2세다.
엄마는 이국적인 취향을 가졌나보다.
어렸을 때 나는 누구보다 애국가를 힘차게 불렀고 누구보다 빨리 외웠다. 조회시간에 국기에 대한 경례도 열심히 했다. 그래서 운동회 날 개회식에 대표로 조회대에 올라 애국가 제창을 하기도 했다. 나는 내가 노래를 잘 불러서 그런 줄 알았으나 나중에 알기로는 신선한 문화적 느낌에서랄까 그래서 나를 쓴 모양이었다.
새아빠는 내게 친절하고 상냥하다. 항상 나를 존중해 주었고 내 앞에서 엄마와의 애정표현도 잘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난 새아빠가 엄마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엄마는 내가 친아빠에 대해 궁금해 하는지 안 궁금해 하는지도 묻지 않았다. 돌아가셨는지 일찍이 이혼을 하신건지조차도 모르고 지냈으니까. 내가 먼저 물어봤어야 하나 아니면 엄마가 먼저 말해줬어야 하나. 이건 마치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묻는 것과 같을 것이다.
학교에서는 다들 내가 우리나라 말을 능숙하게 하는 것에 대해 신기해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보고 바보 같다고 생각했으나 아주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외국인이 영어보다 한국말을 더 잘하는 것같이 느껴졌을 테니까.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일 년에 한 번씩 남해로 나를 데려갔었다. 그곳에는 공교롭게도 미국마을 그리고 독일마을이 있었다.
그곳에는 아빠를 닮은 사람도 새아빠를 닮은 사람도 많았고 나는 그들속에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엄마는 내가 열세 살이 되던 날 처음으로 친아빠 이야기를 해주었다. 친아빠는 참 멋있는 사람이었다고 했고 특히 오뚝한 코가 제일 멋있었다고 했다. 내가 아빠를 닮아서 다행이라고 하면서.
엄마는 나중에 내가 다 자라고 나면 이곳에 내려와 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그러면 나는 짓궂게 미국마을에서 살 것인지 독일마을에서 살 것인지를 물었다. 엄마는 내 콧잔등을 가볍게 치며 다랭이 마을에서 농사지으면서 살겠다고 하기도 했다. 거짓말.
어렸을 적 나는 엄마와 외할머니가 싸우는 걸 몰래 엿본 기억이 있다. 할머니가 엄마에게 못된 소리를 하기에 엄마가 무엇을 잘못했나보다 생각을 하긴 했으나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친아빠가 아직 돌아가신 건 아닌가 보다 라는 일종의 정보만 얻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 정보를 듣고 난 후에도 나는 엄마에게 친아빠에 대한 유무를 확인하지 않았다. 친자식이 아빠를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나는 그것이 마치 엄마를 힘들게 하는 못된 짓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아빠라는 단어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처럼 쉽게 내뱉지 못하며 자라온 것도 있다. 그래서 인지 아니면 엄마가 다시 만난 사람도 외국인이어서 그런지 나는 아빠라는 단어에 집착하지 않는 새아빠가 고마웠다.
나는 사실 엄마보다 새아빠와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눴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내게 새아빠는 아빠가 보고 싶지 않느냐고 먼저 물었다. 나는 그저 새아빠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보고 싶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보고 싶지 않다고 해야 할까.
나는 엄마가 아빠와 왜 헤어졌는지 궁금했다. 언젠가 아빠를 만나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어디에 계신지 내가 만나볼 수 있는지 조차도 모르는 아빠에게.
내가 아빠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이 독일 사람이고 코가 오똑하며 예쁘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가끔 엄마 몰래 혼자 남해를 찾아오곤 한다. 독일 마을에 내가 알지 못하는 우리 아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흰 벽에 주황색 지붕을 한 어느 따뜻해 보이는 집에 나와 닮은 오뚝한 코를 가진 독일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언젠가 나와 닮은 외국 사람을 만나게 되면 아주 반가운 얼굴을 하고 손을 흔들어 줄 것이다. 이렇게 예쁘게 잘 자라고 있다고.
그날 내 눈길을 잡아끌었던 것은 ‘소금꽃 피었네, 갯골로 소풍가자!’라는 문구가 아니라 눈부시게 하얀 꽃이 쏟아져 내리고 있는 모습을 담아낸 포스터였다. 몇 달 째 공강 시간마다 사거리의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크로키를 연습하고 있지만 도심에서 하는 크로키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변화가 필요해.”
쥐고 있는 연필을 내려놓은 내 입에서 자연스러운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처음 창가 자리에 앉았을 때에는 하나하나가 특별해 보였던 사람들의 복장이나 표정들도 몇 달이나 크로키를 계속 해 온 지금은 모두 엇비슷해 보인다. 다들 뭐가 그렇게 피곤한 걸까. 조금 더 다양하고 생기 넘치는 표정들을 그려보고 싶었는데, 미소를 띤 채 걷는 사람들을 찾기가 참 어려운 일이었다.
수업이 없는 날을 기다려 작은 스케치북과 연필 한 자루만을 가방에 챙겨 넣고는 집을 나섰다. 가방이 가벼워서 그런지 아니면, 오랜만에 가보는 지역 축제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역시나 갯골생태공원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코스모스 꽃길도, 갖가지 재미있는 모양을 한 조형물들이나 염전도 아닌 축제를 방문한 사람들의 생동감 넘치는 표정이었다. 사람들이 메고 있는 가방에는 분명히 도시락이나 카메라 같은 오늘을 위한 준비물이 들어있을 것이다. 각자 세운 나들이 계획만큼이나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을 그리기 위해 당장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내 들고 싶었지만, 일단은 공원 안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에 코스모스 길을 따라 걸었다. 초가을인데도 갖가지 색깔의 코스모스가 공터에 한가득 피어 있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점은 어느 방향으로 걸어도 아이들의 웃는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이었다. 표정이 다양한데다가 어떤 표정을 지어도 사랑스러운 아이들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크로키 대상이지만, 대학교 근처에서는 좀처럼 보기가 어렵다. 나는 아이들 한 무리를 데리고 소풍을 나온 초등학교 선생님 같은 기분으로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주의 깊게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모래 대신 하얀 소금이 깔려 있는 놀이터 한 구석에 있는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그저 열심히 놀다가 기운이 빠져 잠시 앉아 쉬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전망대에 올라 갯골생태공원의 전경을 감상하고 내려온 뒤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를 보고는 불안한 마음에 말을 걸었다.
“얘, 혹시 엄마를 잃어버렸니?”
아이가 도리질을 했다. 엄마가 잠시 풍경 사진을 찍으러 다녀오실 동안 오빠와 놀고 있으라고 했는데, 또래 아이들을 만나 신이 난 오빠가 자신을 놀이에 끼워 주지 않는단다. 아이가 손가락질 하는 곳을 바라보자, 초등학교 사오 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모여 노는 가운데서 아이와 꼭 닮은 짱구머리 남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아이가 혼자 다른 곳으로 가 버리면 그대로 미아가 될 터였다. 나는 잠시 아이의 보호자가 되어 주기로 결심하고는 아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냈다.
“언니, 화가예요?”
아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스케치북을 들여다보았다. 아직 화가는 아니고 화가 지망생이지, 하고 솔직하게 대답하려다가 그냥 유명한 화가라고 거짓말을 해 버렸다. 아이는 설레는 눈빛으로 빈 스케치북을 들여다보다가는 자기 얼굴을 그려 달라며 내 앞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사진관에 갔을 때처럼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내 앞에 앉은 아이를 보다가 웃음이 나왔다.
어린아이를 그리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아이들은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고,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끊임없이 웃음을 터뜨린다. 어느 새 내 주변에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아이들은 다음은 자기 차례라며 티격태격하다가도 또 웃는다. 웃음꽃이 피었다. 아이들의 소매며 바지 자락에 묻은 소금꽃들도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아침부터 시끌시끌한 것이 오늘도 화개장터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내다 팔 물건을 손질하느라 분주하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 주리라 하는 마음은 하동사람이나 구례사람이나 같은 마음이다. 섬진강 줄기를 따라 굽이굽이 내려오면 사람도 많고 이야기도 많은 화개장터가 나온다. 새벽부터 고소한 전 부치는 냄새와 사람들의 살 냄새가 섞여 구수함이 더한다.
그곳에 싱싱한 해산물을 내다 팔 준비를 하는 하동남자가 있고 그 바로 옆에는 은은하게 퍼지는 향이 구미를 당기는 산나물을 다듬는 구례남자가 있다.
화개장터에서 하동남자의 생선처럼 싱싱함을 따라올 자가 없었고 구례남자의 산나물처럼 향기롭고 그윽한 나물을 따라올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이 둘은 화개장터의 대들보로 통했다. 언제나 이 둘이 파는 물건이 가장 먼저 동이 났고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도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인지 하동남자와 구례남자에게서 미묘한 신경전이 있었고 서로 더 먼저 물건을 팔고 더 많이 팔기위해 노력하였다.
그래서 하동남자는 구례남자보다 더 먼저 장터에 나와 물건을 손질하였고 구례남자는 하동남자보다 더 늦게까지 물건을 팔았다.
“오늘 고등어가 아주 물이 좋습니다! 어서 한 놈 데려가세요!”
하동남자가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자 구례남자가 이에 질세라 더 큰 목소리로 외친 것이지요.
“오늘 아주 향긋한 곤드레로 따뜻한 저녁밥 지어 드세요. 향기가 아주 그만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장터 상인들이 수군수군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무슨 이야기인가 들어보니 마을 장터 상인들 대상으로 요리경연대회가 열린다고 했다. 이번 요리경연대회에서 우승한 팀에게는 다음 달에 가장 장사목이 가장 좋은 곳에 선정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이번 요리경연대회에 많은 상인들이 열심을 다할 것이 분명하다.
하동남자와 구례남자도 빠질 수 없었다. 자리에 따라 장사수익이 판가름 나기도 한 중요한 대회기 때문이다.
하동남자는 구례남자가 어떤 요리를 내놓을지 신경이 쓰였고 당연히 구례남자도 하동남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동남자는 물 좋은 생선들과 수산물은 자신이 있었지만 미묘한 맛을 잡아내는 채소가 아쉬웠다. 구례남자는 파릇하고 향긋한 채소들로 만들 수 있는 요리가 있었지만 채소만으로는 역시 부족한 느낌이었다.
하동남자와 구례남자는 서로의 재료들이 필요했지만 자존심상 먼저 말을 걸지 못하고 괜한 헛기침만 연달아 내뱉을 뿐이었다. 드디어 경연을 하루 앞둔 날이다. 보다 못한 하동남자가 먼저 구례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흠. 저.. 내일 열릴 요리경연대회에 어떤 요리를 할 생각이오? 혹 혼자 나갈 것이 아니면 나와 함께 나가보는 것이 어떻겠소?”
구례남자도 하동남자에게 함께 나가보자고 말을 붙일 참이었는데 하동남자가 먼저 말을 걸어와 반가웠다.
“좋소! 사실 나도 같이 해보자고 말을 걸참이었소! 당신의 팔딱이는 수산물에 내 싱싱한 채소들이 우러나면 금상첨화가 아니겠소!”
드디어 경연대회가 열리기로 한 날이다. 장터는 여느 때보다 더 활기를 띤 모습이고 상인들의 얼굴은 약간 상기된 표정이 역력하다. 드디어 경연대회가 시작되고 하동남자와 구례남자는 하동남자의 해산물이 들어간 해물뚝배기에 구례남자의 채소들로 맛을 낸 반찬들이 어우러진 입이 떡 벌어지는 한상을 차려냈다.
장터를 찾는 사람들은 물론 심사위원들도 모두 흡족한 미소를 지은 요리는 바로 하동남자와 구례남자의 조화가 담긴 해물뚝배기정식이 당선되었다.
사람들은 음식도 사람처럼 조화가 필요한 것 같다고 하며 흡족해 했고 둘은 그동안의 지난 일은 잊고 새롭게 더 좋은 재료들로 장터에서 새로움을 꽃피울 것이다.
보기에는 그냥 시골 장터이지만 모이는 사람마다 이웃사촌이 되는 그런 정겨운 곳으로 말이다.
차마 그리움을 말로 다 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의례적으로 어떤 장소를 찾아가곤 한다. 그곳에서 보고 싶은 사람의 흔적을 더듬어보기도 하고 음성을 떠올리며 추억의 끝을 걸어보곤 한다. 항상 후회는 무언가 지나고 난 후에 스며드는 것이라 했던가. 준서는 문득 부모님을 만나러 그곳에 간다.
그곳은 늘 조용했다. 먼발치에서 동그랗고 작은 무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약간 허무하기도 했다. 두 분이 나란히 사이좋게 누워계시는 곳이지만 준서의 눈에는 잔디가 무성한 작은 언덕으로 보였으니 말이다.
맨손으로 무덤가에 자란 잡초를 몇 개 뜯으며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 저 왔어요. 저 준서 왔어요.”
혼자서 이야기 하는 것이 어색한 것인지 듣는 사람이 눈앞에 보이지 않아서인지 준서는 퍽 어색해했다. 마치 연극무대에서 독백을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준서는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 부모님과 제법 자주 마찰을 빚었다. 그래서일까 준서는 꽤 긴 방황을 했고 준서의 부모님도 많이 지쳐있었다. 외아들이라 오냐오냐 곱게만 자랐을 것 같다는 다른 사람의 시선과는 다르게 준서의 부모님은 꽤 엄하셨다. 교수였던 아버지는 아들의 방황이나 조금의 일탈도 용납하지 않으셨고 그럴수록 준서는 더 엇나가기만 했다.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생각과 어머니의 방관은 준서를 더욱 힘들게 했다.
준서는 차라리 이럴 거면 부모님이 없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품었다는 것이 몇 년 후 뼈저리게 아픈 말로 남을 줄은 준서도 몰랐을 것이다.
종이컵에 소주를 조금 따르고 절을 올렸다.
“저 곧 결혼해요. 듣고 계시죠? 좋은 사람이에요. 저한테도 잘해주고 마음도 넓어요. 저 이런 유별난 성격 다 받아주는 사람이면 어머니 아버지도 이 여자 인정해주실 거라 믿어요. 부모님 없이 결혼한다고 생각하니까 문득 서글퍼져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이렇게 여기 누워계시니까 정말이지 그 때는 바보 같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결혼을 하고 아이도 태어나면 부모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까요?
사실 전 아버지처럼은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늘 어머니를 외롭게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렇게 옆에 나란히 누워 손 잡아주고 계시죠?”
준서는 부모님이 가지런히 누워계신 이곳을 자주 찾지 않았었다. 옛날에는 삼년상이라고 해서 부모가 돌아가신 후 3년 동안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에 대한 효를 다하고자 여막에 거처하며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올리고 호랑이한테 잡혀가서도 묘성을 쌓기 전까지 죽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던데 준서는 어쩐지 이곳이 낯설었다.
이렇게 부모님께 푸념 아닌 푸념을 늘어놓는 것도 새삼 놀라울 일이었다.
곧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될 준비를 해서일까 준서는 새삼 부모님의 곁이 그리웠다. 호통을 쳐도 쓴 소리를 해도 좋으니 곁에만 함께 있어주기를 바랐다.
산소에 오기 전 준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올리는 편지를 썼다. 어버이날에도 써보지 않았던 서툰 편지로 준서는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그리고 산소 앞에 조심히 편지를 놓아두었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 편지였지만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진실 된 편지였다.
편지를 놓아두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왠지 부모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온 기분이었다. 그리고 낯설 것만 같았던 이 길이 낯설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이곳을 찾고 부모님을 뵐 때도 낯설지 않을 것이다.
“이야, 서울은 역시 죽이네. 사람들 때깔부터가 다르다. 우리 동네랑은 비교도 안 된다.”
서울로 갓 상경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느끼는 서울의 첫인상은 그랬다. 사람들은 저마다 바쁜 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했고 고층 건물들은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아찔한 높이를 자랑했다. 고층 건물 하나를 가리키며 저기를 올라가려면 며칠 전에 올라가야 하나? 라는 촌티 팍팍 나는 생각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 당시에는 엘리베이터라는 것이 생소할 시기였으니 그럴 만도했다.
내가 서울이라는 곳 그것도 영등포구라는 이 네 글자를 기억하는 건 단 하나였다. 다름 아닌 ‘라디오’ 그때의 청춘이라면 누구나 문세오빠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었을 것이다. 나 역시 매일 같은 시간이면 지지직거리며 주파수를 잡았고 스탠딩 불빛 하나만 켜놓은채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매일 밤 10시 5분부터 밤 12시까지 문세오빠의 달콤한 목소리와 각각의 사연들 그리고 언제 나올지 모르는 신청곡을 기다리는 재미는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가사를 받아 적느라 팔이 아프도록 글씨를 끼적인 적도 있고 문세오빠가 읽어주는 사연에 눈물콧물을 쏟기도 했다.
라디오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항상 라디오에 신청곡이나 사연을 보내라며 말하던 곳이 영등포구 여의도동 사서함…… 이렇게 시작했다. 지방에 사는 나로서는 서울 하면 내가 늘 들어오던 영등포구 여의도동밖에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그렇게 내게 영등포구 여의도동은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그런 공간이었다.
그렇게 올라온 서울은 역시나 특별했다. 사실 정신없는 도로와 사람들 때문에 별 다를 것 없는 공간이 더욱 특별해 보인 것일 수도 있다.
“야야! 저 봐라. 저기 진짜 높은 건물 있다. 저게 다 몇 층일까?”
“야, 니 저거 모르나? 63빌딩!! 63빌딩이니까 63층이지.”
“니는 어떻게 알았는데? 그나저나 63층? 이야. 저기 올라가면 서울 시내 다 보이겠다. 그렇지?”
“올라가볼래? 여기까지 왔는데 63빌딩도 안 올라가보면 사람들이 욕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긴 시간을 보낸 채 도착한 곳은 63빌딩의 전망대였다.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꿈에 그리던 서울 길. 그리고 그 속에 속해있는 나 자신이 신기한 순간이었다. 서울이라는 단어가 마치 다른 나라 같은 느낌이었는데, 내심 뿌듯해지는 순간이었다.
“야! 저기 저 방송국! 저기에서 문세오빠 라디오 하잖아. 저기서 한참 있다 보면 오빠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바보야, 지금 아직 오후 4시도 안됐는데 무슨, 오빠 라디오 밤에 하는 거 몰라?”
“아, 그렇지. 그럼 우리 오늘 우리 여기 왔었다고 라디오에 사연 보내볼까? 그럼 당첨돼서 문세오빠가 우리 이름도 불러줄걸?”
63빌딩에서 내려와 한참을 문방구를 찾아 헤맸다. 우리 동네는 그냥 마을 어귀에 자그마한 문방구가 하나쯤은 있었는데 여기는 그 흔한 문방구도 잘 보이지 않았다. 무슨 서울이 문방구 하나 없나 하며 지나가는 사람에게 문방구를 물어보니 손끝으로 가리키는 곳에 도착하니 문구와 여자아들이 좋아할 만한 머리핀, 작은 장난감까지 함께 팔고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져 한참을 구경하다 예쁜 엽서 하나를 골라왔다.
투. 문세오빠.
안녕하세요? 문세오빠. 이렇게 시작한 글에 우리는 참 손글씨로 어여쁘게 엽서를 꾸몄다. 긴장감에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 글이 영등포구 여의도동으로 드디어 실려 가는 구나 생각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는 두 손을 모아 엽서를 빨간 우체통에 집어넣었다. 언제 방송이 될지도 모른 채 혹여 채택이 안 되면 어쩌나 노심초사 걱정도 되었다.
앗, 10시다! 별이 빛나는 밤에 할 시간이야.
별이 빛나는 밤에. 문세오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얼굴에 꽃받침을 하고 이불속에 쏙 들어가 라디오를 한 참 듣는데 익숙한 이름과 글귀가 흘러나왔다.
투 문세오빠.
안녕하세요? 문세오빠.
그렇게 우리가 보낸 사연이 채택되어 라디오를 타고 흘렀다.
처음 영등포구를 찾던 날, 63빌딩에 올라가 서울 시내를 본 것, 라디오에 사연을 쓰게 된 이야기까지 라디오는 참 신기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타고 흘렀다.
라디오에 온 감성을 쏟았고 학창시절이 라디오로 가득 차 있던 시기. 그 속에는 가 본적이 있어도 가보고 싶은 영등포구 여의도동이 있다.
오늘은 어떤 사연이 이 주소로 흐르게 될까.
내가 생각한 여행은 이런 것이었다. 친구와 도란도란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며 푹 쉬다 돌아가는 국내 여행. ‘레일바이크를 타고 섬진강변을 따라가며 자연을 만끽해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나 홀로 여행이 되고 말았다.
새벽 여섯 시쯤 되었나, 민정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 왜 벌써 전화했어. 일곱 시에 만나기로 했잖아.”
“우리 쁘띠가, 우리 쁘띠가! 흐윽윽윽!”
쁘띠는 민정이 키우는 개다. 나이가 열 살이 넘었으니 사람으로 치면 노인에 가깝다. 외동인 민정과는 형제처럼 지낸지라 쁘띠에 대한 민정의 사랑이 상당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쁘띠가 호흡곤란이 왔단다. 그래서 민정은 지금 24시간 동물병원에서 대기 중이다. 결국 민정은 여행 출발 한 시간 전, 펑크를 냈다.
그렇다고 여행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열차도 끊고, 숙소도 예매하고, 고대하던 레일바이크도 나를 기다린다. 혼자라고 못 탈쏘냐! 난 결국 혼자만의 여행을 감행했다.
그러나 애초에 시작이 꼬여서 그런 걸까? 벌써 레일바이크에서 발이 묶였다. 이인용이라도 혼자 페달을 밟아 갈 생각이었는데, 혼자서는 탈 수 없단다. 그리고 이건 몰랐던 사실인데, 증기기관차가 레일바이크와 같은 레일을 사용한단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운행하긴 하지만, 그래도 자칫 잘못하면 열차랑 같이 갈 수 있다고…….
직원들이 혼자 태울 수 없다고 말리는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혼자 침곡역에 멀뚱히 앉아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나는 눈에 불을 켜고 나처럼 혼자온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어쨌든 둘이 타기만하면 되는 거 아닌가! 모르는 사람이라도 좋으니 어떻게든 레일바이크를 타고 싶었다. 그때, 침곡역 구석에 앉아있는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저기, 혼자 오셨어요?”
“아, 네.”
“괜찮으시면 저랑 레일바이크 타실래요? 저도 혼자 왔거든요.”
“아, 그런데 어쩌죠. 저도 레일바이크 탈 생각으로 왔는데, 아까 곡성역에서 그만 다리를 삐끗했어요. 오기로 오긴 했는데, 아무래도 페달밟는건 무리 같네요. 죄송해요.”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내가 아니었다.
“일단 타세요! 페달을 저 혼자 밟을게요. 보시다시피 저 허벅지 끝내줘요.”
나는 막무가내로 남자의 승낙을 받아냈다. 그리고 절룩이는 그를 부축하여 레일바이크에 태웠다.
“여기 직원들 앞에서는 다리 안 아픈척 하세요. 잘못하면 또 저지당하니까.”
신호와 함께 꿈에 그리던 레일바이크 체험이 시작됐다.
“여러분! 앞사람과 간격 맞추시고, 뒤처지지 않게 페달 열심히 밟으세요!”
그러나 우리 앞에는 운 없게도 건장한 남자 둘이 타고 있었다. 그들을 태운 레일 바이크는 이미 저 멀리 사라진 후였다.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죄송해요! 한쪽다리로라도 페달 좀 밟아볼게요.”
남자는 미안해했다. 침곡역에서 가정역까지 레일바이크로 사십분 정도 걸린다는데, 십오 분 정도 왔을까? 벌써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분명 섬진강은 아름다웠고. 레일 위를 지나는 기분도 좋았다. 그렇지만 너무 힘들었고, 증기기관차가 언제 돌진할지 모른다는 이상한 공포가 밀려왔다. 아직 레일바이크 타다 증기기관차에 치여 죽었다는 얘기는 못들은 것 같긴 한데……. 도저히 기운이 나질 않았다. 젖 먹던 힘까지도 쥐어짤 수 있는 동기부여가 절실했다.
나는 페달을 밟으며 소리쳤다.
“저기요!”
“네?”
“제가 너무 기운이 없어서 그러는데요! 페달 빨리 밟게 힘 좀 북돋아주실래요?”
“어, 어떻게요? 음악 틀어드릴까요?”
“아뇨!”
남자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 졌다.
“그럼, 제가 불러야 돼요?”
“아뇨! 노래 말고 다른 거요.”
이 말을 할까 말까 할까 말까 하다가 그냥 뱉었다. 아, 내가 죽겠다는데! 우리 두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잖아!
“가정역 도착하면 저랑 맥주한잔 하실래요?”
내 말을 들은 남자의 얼굴에서 약간의 긴장이 사라졌다. 오호, 싫지는 않은가본데?
“하하. 네, 그래요. 신세도 졌으니 제가 살게요.”
하지만 나의 패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전화번호도 알려주세요.”
“네? 아, 알겠습니다. 밟으세요.”
아싸! 나는 신이 나서 전력을 다해 페달을 밟았다. 더욱 힘차게 밟았다.
팔이 아파 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을 하면 딱 떠오르는 건 높고 맑은 가을 하늘인데, 왠지 며칠 째 날씨가 우중충했다. 그래도 바람에 단풍잎 한 장이 날려 오는 것을 보니 가을은 가을이다.
이직을 앞두고 몇 달 간, 일을 쉬게 된 나는 이 며칠 동안 편지를 썼다. 마치 동물원의 오래 된 노래처럼, 그리고 동물원의 노래를 들으면서 말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 바로 취업을 해서 쉴 새 없이 일만 한 지 어느덧 삼 년. 친구들은 다 서울에 취업을 했지만, 나는 이사한 집 근처에 취직을 했다. 일을 하랴 저축을 하랴 주말에는 부쩍 건강이 안 좋아지신 어머니의 병간호를 하랴, 그야말로 정신이 없었다. 친구들은 잘도 놀러 다니는데 나만 왜 이렇게 바쁘게 살아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내 나름대로 장녀의 책임을 다 하고 있는 것이 뿌듯하기도 했다.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친구들과 즐겁게 술잔을 기울이며 속 얘기를 털어놓은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만나지를 못하다 보니 연락이 뜸해지는 것도 당연지사. 서운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끔, 간절곶에서 보았던 소망 우체통이 생각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해가 빨리 뜨는 곳이라 해서 찾아간 간절곶이었지만,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소망 우체통이었다. 사람 키보다 훨씬 더 큰 그 우체통을 보며 나는, 저 안에는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담겨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 머릿속에 차 있는 이 그리움들을 모두 보내려면, 역시 그 우체통에 찾아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문구점에 가서 편지지 몇 묶음과 펜 한 세트를 산 것이었다. 그날 저녁부터 나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오랜만의 조우는 특별해야 했다. 휴대전화를 통해 께적께적 내 소식을 알리고 싶지 않음이 첫째요, 인간관계에 조금은 진지해져 보고 싶은 마음이 둘째였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의 네 권의 졸업앨범을 모두 펼치고, 편지를 쓰고 싶은 사람들의 이름과 주소를 편지봉투에 옮겨 적었다.
초등학교 때의 친구가 세 명, 중학교 때의 친구가 다섯 명, 고등학교 때의 친구가 열한 명, 그리고 대학교 때의 친구가 열일곱 명. 손을 꼽아 몇 명인지를 세며, 세월이 흐르면 잊혀 진다는 게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유경이에게. 안녕, 나 신윤지야. 나이를 두 배는 먹었으니까 내가 기억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사학년 때 네 짝이었던, 빨간 실내화 가방 주인 말이야…….’
‘민지에게. 안녕, 나 윤지야. 난 아직도 우리 학교 앞에 있던 떡볶이 아주머니의 얼굴이 기억 나. 혹시 아직도 그 가게가 있니? 너랑 다시 그 곳에 가고 싶다. 내 사춘기 때의 기억들은 다 거기에 있어…….’
‘윤수에게. 안녕, 나 윤지! 잘 지내지? 고등학생 때에는 그렇게 날 쫓아다니더니, 연락이 없는 걸 보니 대학 가서 예쁜 여자 친구라도 생겼나봐? 하긴, 지금 생각해보니 너도 꽤 인기가 있었지. 하지만 그래도 넌 내 친구야, 그냥 친구. 네 동생도 이제 대학생이겠구나. 어렸을 때 진짜 귀여웠는데…….’
‘현경이에게. 야! 어떻게 이 년 동안 연락이 없을 수가 있어? 얼굴도 잊어버리겠다야. 내가 그 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기나 해? 나 이제 쉬어. 그러니까 이거 받으면 빨리 전화 해. 내가 이미 너희 집 앞에 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긴장하고. 아, 그리고 언제 한 번 같이 윤 교수님 뵈러 가자. 윤 교수님이 우리 진짜 예뻐하셨잖아. 설마 벌써 다른 애제자가 생기신 건 아니겠지? 그럼 진짜 서운할 것 같아…….’
편지를 쓰며 나는 예상보다 많은 후회를 했고, 예상보다 많은 그리움을 느꼈다. 편지지 한 장씩에 꾹꾹 눌러 담은 기억들만큼이나 말이다. 마지막 편지에 마침표를 찍으며, 나는 대나무밭에서 목청껏 소리를 내지른 이발사처럼 후련해졌다. 내 앞에, 못 다한 이야기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봉투 하나하나를 밀봉해가는 동안, 흐린 가을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내일은 소망 우체통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