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던 내게, 할머니들은 내 부모님이 용을 타고 멀리 떠나셨다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주 훌륭하신 분이었다 한다. 강직하고 정의감 넘치는 성격의 아버지와 온화하고 정이 많은 어머니. 모두들 자신의 부모를 더러 이렇게 묘사하곤 하지만, 내 경우는 조금 특별하다. 그러니까 그게 얼마만큼의 훌륭함이냐고 하면, 이십 여 년 전의 교통사고에서 두 분의 몸으로 나를 끌어안아 내 목숨만을 구하고 돌아가셨을 정도. 딱 그 정도의 훌륭함이다.
부모님께 ‘감사’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다. 아마 부모님의 훌륭함이 내 성격에까지 번져 오기까지는, 꽤 오랜 세월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적어도 6년 보다는 많은 시간 말이다. 부모님과 함께 한 시간이 짧아서인지 나는 좀처럼 부모님의 얼굴이나 성함을 기억해내지 못했고, 대신 고아로 지내 온 시간 동안 견뎌야 했던 숱한 아픔들을 기억했다. 부끄럽게도, 나는 내 생의 대부분을 부모님을 원망하는 데에 쏟았다.
“야가 또 뭘 하고 있노, 퍼뜩 좀 온나.”
“아이구, 사돈. 좀 천천히 가요. 노인네가 무슨 걸음이 그리 재답니까?”
나는 두 할머니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나란히 굽은 할머니들의 등이 보였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나는 이 두 분의 손에 자랐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자식을 한 날 한 시에 잃은 두 분은 이십 여 년을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 오셨다. 자식을 잃은 아픔도, 엇나가는 손자에 대한 아픔도 함께 나누어 오셨던 것이다.
“천천히 가요, 차 시간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어요.”
내 말에 뒤를 돌아본 할머니들이 곧바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시다 다시 고개를 돌리셨다. 오늘은, 할머니들의 품을 떠나 서울로 향하는 날이다.
이십 여 년. 누구도 짧다고는 말하지 못할 그 세월 동안 두 분의 할머니는 매주 이 산길을 오르셨다. 슬픔을 이기기 위해,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내 이름의 끄트머리와 같은 글자를 쓰는 절을 찾아 시작한 산행은 이제 두 분의 낙이 되었다. 그 이십 여 년 동안 한 번도 할머니들을 따라 이 길을 오른 적이 없다니, 나도 좋은 손자는 아니라는 생각에 새삼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산 중턱의 너른 터를 너머로 지붕을 환히 펼친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둥그런 산의 능선들과 어우러진 사찰의 모습이, 마치 작은 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서 울리는 풍경 소리가 귓가에까지 와 닿았다. 화려함도 떠들썩함도 없는 절을 왜 그렇게들 찾아가나 했더니, 이 따뜻하고 향기로운 분위기 때문이었나 보다. 두 할머니는 석탑 앞에서, 또 불상 앞에서 끊임없이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셨다.
“뭘 그렇게 비시는 거예요?”
“뭐긴, 이놈아. 다 너 잘 되라고 비는 거지. 이십 년 동안 빌었으니 이제 곧 지문이 닳겠어.”
나는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웃었다.
“봐라, 여기 우리가 서 있는 데가 용이 웅크린 자리다. 옛날에 이 산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올랐다고 하는데, 원래는 열 마리가 있었다고 하데. 혹시 아나. 니가 그 마지막 용을 타고 하늘에 오르게 될지 말이여.”
“그렇게 오래 마음고생을 하며 웅크려 있었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서러웠겠노. 우리가 그 마음을 다 용한테 맡겨 놨다. 이제 훨훨 나는 일만 남은 것이여.”
나는 아리송하고도 복잡한 마음으로 할머니들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할머니들은 내게, 부모님이 용을 타고 떠나셨다고 했다. 저 멀리 구름 너머로, 춤추듯 너울거리는 용의 등허리를 타고 가셨다 했다. 이제 내게 용을 타고 떠나라 하시는 것을 보니, 할머니들은 아직 그녀들의 자식을 보내지 않으신 것이 분명했다.
“용진이 니도 용 허리 한번 타그라. 근심걱정 다아 용한테 맡기고, 니는 그냥 훨훨 날아가그라.”
그 때, 할머니들의 미소 아래로 오래 된 이야기 속의 용들을 보았다. 쉬이 보지 못할 곳, 너무 멀어 쉽게 닿지 못할 곳에서 할머니들의 소중한 보물을 끌어안은 용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자영업을 하기 때문에 평소 쉽게 가게 문을 닫을 수 없었던 남자. 그래서 주기적으로 떠나는 휴가도 한번 제대로 떠나본 일이 없다. 그렇게 쉼 없이 달려온 3년이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사업이었기 때문에 남자는 지난 3년간 아내와 아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이게 다 처자식을 위해 뼈 빠지게 버는 돈이라고 생각해왔으니까 미안하긴 했어도 조금은 당당했다. 그런 남편을 아내도 적잖이 이해해주는 눈치였다.
생전 가게로 전화를 안 하는 아내인데 웬일인지 가게로 다 전화를 했다. 아내의 말이 빨랐고 약간은 울먹였다.
“전화가 왔었어요. 방금. 민준이 담임선생님한테.”
“담임선생님한테? 왜? 민준이 뭐 사고친거야?”
“아, 아니. 학교에서 청소년 우울증 상담검사 같은 걸 받았는데. 결과가….”
평소 전화는커녕 부모님 모시고 오라는 소리 한번 듣지 않았던 터라 심장이 덜컹했다. 차라리 친구와 싸우거나 숙제를 안 해왔다는 전화였으면 좋았을 걸. 담임선생님의 전화는 뜻밖에도 아이가 학교에서 받은 청소년 우울증에서 우울증 수치가 높게 나왔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좀 더 자세한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전화였다.
우울증. 학교 다니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들었나? 아니면 학교에서 친구들과 관계가 좋지 않나? 그런 것도 아니다. 아내의 말대로라면 담임선생님께선 아이들과의 문제는 없어 보인다고 했으니까.
누구를 위한 3년의 시간이었나 생각한다. 남자는 가장으로서 나름대로 열심히 하였는데 아이는 아빠의 빈자리를 조금씩 넓혀가고 있었나보다.
모처럼 가게 문을 닫고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월성계곡으로 떠났다. 병원을 가보기 전 일단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담임선생님의 소견이었다. 아이는 즐거워보였다. 담임선생님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아니 아내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아이에게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감정 상태는 어떤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방송을 타서인지 계곡에는 때 늦은 피서객이 몰려들었다. 아빠와 즐겁게 물놀이를 하는 아이도 보였고 튜브를 타고 물살을 즐기는 아이들도 보였다. 멀리서 고기 굽는 냄새와 옥수수를 먹는 아이들이 보이며 한가롭기 그지없었다. 내 아이의 머릿속도 아니 마음속도 한가롭다고 느껴지면 좋을 텐데 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물은 시리도록 맑았고 푸른빛이 맴도는 풍경은 봄의 화사함만큼이나 밝았다. 저마다 하하 호호 웃는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방갈로 마다 퍼져나갔다.
하루를 아이와 꼬박 즐겁게 놀아본 것이 얼마만인지 남자의 머릿속은 금세 까마득해졌다. 내심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는 해맑게 방갈로를 뛰어다녔고 여느 때와 같이 즐거워보였다. 은근슬쩍 학교에서의 생활을 물어보기 좋은 시간이었다.
“학교 다니는 것이 힘들어? 친구들과 사이는 어때? 공부하는 것이 지치니?”
“아빠, 그렇게 한꺼번에 많이 물어보면 어떻게 해요.”
“그래도 빨리 대답해봐. 응?”
“음. 아빠! 우리 다음에는 또 어디가요?”
탁. 식탁에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가 무심하고 매정하다. ‘크음’ 하고 남편이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기침에는 증발하다 남은 알코올의 잔해가 남아있었고 이내 공기 중에 산산이 부서졌다.
후루룩후루룩 소리만 공중에 맴돌았다.
오늘도 아침엔 청양고추 팍팍 들어간 콩나물국이다. 남편에게 술 좀 그만 마시고 몸 생각 좀 하라고 그렇게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해도 마이동풍이다. 이런 잔소리가 오고 가고 무거운 침묵의 시간이 반복될 때면 어느 집이나 어느 가정이나 다 비슷한가 보다 생각이 든다. 예전에 우리 엄마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킁킁, 이건 아빠의 냄새다. 아빠가 또 약주를 한 잔 하신 모양이다. 엄마가 한결같이 잔소리를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아빠는 참 올곧은 사람이다. 엄마는 아빠에게 잔소리를 빙자하여 모진 소리도 하지만 그건 다 아빠를 위한 거란다.
술이 좋으면 술이랑 함께 살라고 하던가, 술독에 빠진 사람도 당신만은 못할 거야라는 등의 말을 들어도 아빠는 그저 사람 좋은 웃음이다.
아빠는 내게 호랑이같이 무서운 사람이다. 요즘은 딸 바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딸이라면 그저 풀려버린 자물쇠처럼 무장해제인데 우리 아빠는 철저했다. 사랑한다는 말조차 언제 들었나 가물가물하다. 심지어 다른 애들은 늦은 시간이 되도록 딸이 귀가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전화를 한다는데, 우리 아빠가 내게 전화를 할 때에는 아빠 출근 시간에 차키를 두고 왔을 때 가지고 내려오라는 것이 유일했다.
그런 아빠가 무장해제가 되고 딸 바보가 되는 날. 바로 술을 한잔 하시고 들어오실 때이다.
“연주 자니? 아빠 왔어. 아빠가 왔는데 왜 나와 보지도 않아? 이리 와봐.”
“아휴, 술 냄새. 아빠 또 술이야?”
“아이고, 우리 연주 아직 애기네 애기야. 아빠 수염 까끌까끌 하지?”
“아, 따가워. 그리고 이것 좀 놔. 숨 막힌단 말이야.”
사실은 숨이 막혔던 것이 아니라 아빠의 품이 썩 어색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아빠는 지금 이런 모습을 다음날 아침 기억하실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항상 아빠가 술을 드시고 온 다음날이면 북어와 콩나물을 넣은 해장국을 끓여주신다. 특히 청양고추를 송송 썰고 고춧가루까지 팍팍 쳐 아주 매콤하고 칼칼하게 말이다. 내가 맵다고 고추를 쏙쏙 건져놓으면 아빠는 아빠그릇에 넣으라고 손짓을 한다.
엄마는 밥을 먹는 내내 아무 말도 없다. 아빠도 마른기침만 뱉을 뿐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아빠가 술을 드시고 오시는 날마다 벌어지는 풍경이다. 숟가락으로 밥 한 숟갈 뜨고 엄마 눈치 한번. 국 한 숟갈 뜨고 아빠 눈치 한 번씩 번갈아가며 밥을 먹으면 엄마가 무거운 침묵을 깨고 괜히 나에게 호통을 치신다. 밥 먹는데 집중하라고. 치, 밥 먹는데 무슨 집중이람.
내가 더 어렸을 때는 엄마가 아빠와 이혼을 하는 줄 알았다. 왜냐하면 우리 반 지영이네 엄마와 아빠가 이혼을 했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지영이네 아빠가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지영이네 엄마는 우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빠가 술을 마시고 온 날이면 안방 문을 배꼼 들여다보며 엄마가 우시는지 확인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아빠를 미워한 것이 아니었다. 매콤하고 칼칼한 청양고추를 듬뿍 넣어 아침상을 차려드린 걸 보면 안다.
내가 지금 그러하고 있는 것과 같이.
중학교 3학년 국어 시간, 같은 반 아이들은 우리가 사는 동네가 교과서에 나온다며 즐거워했지만 나는 그 틈바구니에서 내가 원미동에 살게 된 것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마치 소설 <원미동 사람들>의 한 사람처럼 나는 눈앞에 닥쳐온 걱정들을 빠르고 무딘 방법으로 해결하길 원했으며 별다른 불만사항은 물론이고 별다른 꿈도 없었다.
넉넉지 못한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난 탓일까,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 본 곳이라고는 국립공원이나 친척 집뿐이었다. 또래들과 같은 시기에 컴퓨터를 사지도 못했고, 유원지나 해외여행 같은 곳에 가자고 졸라본 적도 없었다. 내 또래의 아이들이 디지털 시대를 달릴 때 나는 홀로 아날로그 시대를 걸었다. 남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틀 만에 집에 들어오신 아버지에게 방학숙제를 위해 박물관에 가야 한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웃으며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주셨고, 나는 묵묵히 오천 원짜리를 받아들고 집을 나섰다. 내가 원미동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은 부천 만화창작 스튜디오에 입주하신 아버지 때문이었다. 좀처럼 돈을 벌기 힘들다는 직업을 택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자간의 대화가 갈수록 줄고 있는 것 또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원미 1동의 연립주택 203호에서 가장 가까운 박물관은 지하철로 네 정거장 거리에 있는 부천 만화박물관.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아주 현실적인 범주 안에서의 판단이었다. 대강 훑어보고 견학문을 쓸 요량으로 빠르게 걸었다. 영화관에 가기보다는 만화방에 틀어박혀 있는 경우가 훨씬 많은 나였지만, 아이들처럼 뽀로로를 외치며 뛰어다닐 수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멈추어 선 곳은 볼록거울 앞이었다. 돌연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 내 모습이 사방에 펼쳐진 것에 놀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기저기 뒤틀리고 구부러진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바라보며 온갖 생각을 다 해 보았다.
왜 가난한 집에 태어났을까. 기껏 외출할 기회가 생겼는데, 왜 고작 집 근처에 위치한 박물관에 와야 하는 것일까. 내 어깨는 왜 항상 움츠러들어 있을까. 그리고 왜 하필 여기에 이상한 거울을 설치해서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건지에 대한 의문에 코너의 이름을 보니 ‘만화가의 머릿속’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한 마디가 불쑥 튀어나왔다.
“뭐야.”
웃음이 터진 나는 만화가의 머릿속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찬찬히 살펴보았다. 엉뚱한 상상력과 꿈이 넘치는 일상. 그곳은 아버지의 머릿속이었다. 행복과 불행은 종이 한 장의 차이라 하였듯이, 우스꽝스러움과 독특함 또한 종이 한 장의 차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폐관시간까지 박물관을 떠나지 못했다. 만화가들은 여전히 가난해 보였고, 하나같이 행복해 보였다.
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내 몫의 저녁상을 차려놓은 채로 잠들어계셨다. 분명 어젯밤에도, 어쩌면 그제 밤에도 밤샘을 하셨을 것이다. 나는 장롱에서 이불을 꺼내어 아버지에게 덮어드리고는 다 식은 국을 맛있게 떠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한국 만화 영상 진흥원 안에 위치한 비즈니스 센터로 일터를 옮기셨다. 입주 경쟁이 꽤 치열한 곳이라고 했는데, 용케 심사를 통과하셨다. 한국 만화 영상 진흥원과 부천 만화박물관이 부천 영상 문화 단지 안에 나란히 입주해 있었다. 사무실 이전을 도우며, 나는 아버지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아빠, 나 있잖아. 나도 그림을 그려볼까 해.”
아버지는 대답 대신 웃으셨다.
그날 저녁, 나는 원미동 연립주택의 거실에 누워 <원미동 사람들>을 읽었다. 교과서에 실린 김포 슈퍼와 형제 슈퍼 얘기가 전부인 줄 알았더니 꽤 두꺼운 연작소설이었다. 첫 장을 넘기자 첫 단편의 소제목이 보였다. ‘멀고도 아름다운 동네’. 그곳은 내가 사는 동네였으며, 아버지가 사는 동네였다.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에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또 포장마차 가려는 거잖아. 난 싫다고! 레스토랑 가자니까?”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교에 다니는 딸이 오랜만에 집에 왔다. 귀하신 얼굴을 영접했으니, 마땅한 대접을 해 드리는 것이 인지상정. 아빠랑 단둘이 외식 한 번 하자며 대뜸 손을 잡아끌었는데, 녀석이 예전 같지가 않다.
아내가 집을 나가 버린 지도 십여 년이 흘렀다. 집을 나갔을 때에 바로 찾으러 나갔다면 세 식구 오순도순 사는 집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인데, 자존심 때문에 잡지 않은 것이 지금까지도 한으로 남아 있었다.
후회는 빠르게 찾아왔다. 나는 매일 술을 마셨고,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딸애가 내 뒷바라지를 해 주곤 했다. 정신을 차리고 난 뒤에는 그것이 죄스러워 미선이를 공주님처럼 오냐오냐 해 가며 키웠다. 엄격한 아빠 노릇을 하기에는 이미 늦은 일이었지만, 이제는 딸애가 내 장단에 맞춰주질 않으니 이건 또 서럽기도 하다.
“우리 딸도 다 컸으니 이제 아빠랑 술 한 잔 기울일 수도 있는 거지, 뭐. 너도 포장마차 떡볶이랑 국수 좋아하잖아.”
일부러 풀이 죽은 표정을 짓자, 미선이가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게 눈에 보였다. 내가 어디 가서 말은 안 하지만, 우리 미선이는 이렇게 속이 깊고 정이 많은 것이 제일 큰 장점이다.
“아니, 내 말은……. 아빠 좋아하는 것도 많이 먹었으니까 이제 내가 좋아하는 것도 좀 먹으면 안 되냐고. 나 피자도 좋아하고 해물도 좋아하는데, 아빤 내가 집에 오면 맨날 분식만 먹이려고 하잖아.”
듣고 보니 그도 그렇다. 이건 내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었다. 하지만 레스토랑 음식은 영 내 입맛에 맞지를 않으니,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저녁때를 완전히 넘겨 버릴 것 같았다. 미선이는 아까부터 뭘 하는지 제 방에서 나오질 않고,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거실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사과를 먼저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넉살좋게 다시 한 번 말을 붙여볼까 고민하고 있던 그 때, 미선이가 방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아빠, 찾았어! 가자!”
무어라 대답을 할 틈도 없이 미선이 손에 이끌려 집을 나섰다. 미선이가 이끄는 대로 따라 걷고 있는데, 문득 아내가 집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 생각났다.
미선이가 정해 준 통금 시간은 아홉 시. 그 어린 것이, 아홉 시가 넘으면 나를 찾아 온 동네 포장마차를 다 돌아다녔다. 어린 애 혼자 술파는 곳을 기웃거리고 있으니, 처음에는 덮어두고 혼을 내던 동네 어른들이 언젠가부터 내가 있는 곳을 넌지시 일러 주었다고 한다. 예쁜 딸을 두고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고 처음 보는 어르신에게 호통을 들은 기억도 있는 것을 보니, 동네에서 꽤 유명해졌을 정도였나 보다.
동네 포장마차 한 구석에서 만취해 잠들어 있는 나를 찾아내면, 미선이는 항상 ‘우리 아빠, 괜찮다. 괜찮다.’하고 말하며 웃어른처럼 내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고는 내 주머니를 뒤져 술값을 계산하고 고사리 손으로 나를 잡아끌어 집으로 데려왔었다. 술에 취한 와중에도, 어린 딸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정말 부끄럽고, 또 한편으로는 정말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미선이와 함께 도착한 곳은 허름한 파전 집이었다.
“포장마차가 싫다더니, 파전이 먹고 싶어서 그랬어?”
머쓱해진 내가 말을 건네자. 미선이가 웃는다. 아빠가 파스타니 피자니 하는 것들 싫어하는 거 다 안다고. 우리 둘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뭐가 있을까 해서 찾아봤더니, 동래파전이라는 게 있었단다.
“봐봐. 파전이라도 해물 잔뜩 들어가고 두꺼운 게 꼭 시카고 피자 같잖아?”
내가 시카고 피자가 뭔지 알 턱이 있나. 파전 한 입에 막걸리 한 대접을 기분 좋게 원 샷 하는 딸을 보니 왠지 콧등이 짠해져 왔다. 아빠가 이런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오늘은 꼭 우리 딸이 만취해버렸으면 좋겠다. 의젓한 우리 딸은 취해서 미안하다며 민망해하겠지만, 나는 괜찮다며 미선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것이다. 그리고는 손을 잡고, 아니 등에 꼭 업고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사 년 차 커플. 남들은 그 쯤 되면 서로에게 질릴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악담을 농담처럼 건네지만, 우리는 결혼을 생각할 만큼 진지했다. 새내기 때부터 사귀기 시작 해 내가 입대를 하고, 제대 할 때까지도 우리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권태기가 오는 것을 걱정하기에는 이미 잔뼈가 굵어진 사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 나는 그것이 나만의 착각이었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특별한 곳에 가고 싶어.”
밥을 먹다가 무심하게 한 마디 툭 던진 말이었지만, 나는 그 말에 민주가 원하는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민주는 눈에 띄게 짜증이 많아졌고, 우울해 하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민주의 이런 태도를 이별을 준비하는 여자의 태도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군대에 다녀오면 남자가 여자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하지만, 내게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민주는 내가 군대에 가기 전보다 훨씬 더 예쁘고 어른스러워졌다. 물론 외모나 성격 때문에 민주를 사랑한다는 말은 아니다. 내게 민주는 우리가 함께 해 온 모든 시간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민주를 데리고 부산으로 향했다. 민주는 이제 가 볼만 한 곳은 다 가 보지 않았느냐며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런 민주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저 오늘 내가 준비한 풍경이 민주가 보았던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답기만을 빌었다.
민주를 데리고 도착한 곳은 광안대교가 잘 보이는 민락 수변공원이었다. 벌써부터 사람이 북적이고 있었는데, 민주는 또 그게 불만인 모양이었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으냐고 하며 화를 내는 통에 애를 먹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겨우 돗자리 하나를 깔고 자리에 앉았다.
“이 먼 데까지 와서 쉬지도 못하고 여기 있자고?”
나는 조금만 기다려 보라며 민주를 달랬다. 뭐가 민주를 그렇게나 짜증나고 화나게 만드는 것일까.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의기소침해져 버렸다. 내가 말을 하지 않자, 우리 둘 사이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처음 사귀었을 때를 생각하며 기차 안에서 건네주었던 인형은 가방 안에 처박혀 있는 모양이었다. 예전에 민주는 토이 크레인에서 인형을 뽑아다 주면 어린 애처럼 하루 종일 그것을 안고 있곤 했었다. 이제는 그런 사소한 것들도 모두 변해 버린 것이다. 괜스레 장난을 치려다 민주의 화만 더 돋우게 된 나는 거의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축제가 시작 되는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주의 입꼬리가 움찔거리는 것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마 입을 열면 민주는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말을 할 것이다. 헤어지자는 그 말을 말이다. 나는 민주를 보며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
“성준아, 나 할 말이 있어.”
그 순간, 첫 불꽃이 터졌다. 민주의 다음 말은 불꽃이 터지는 소리와 사람들의 환호성에 묻혀 버렸다. 나는 놀란 얼굴로 꽃처럼 피어나는 불꽃을 바라보는 민주를 꼭 안아 주었다. 민주는 봄날 캠퍼스에서처럼, 나를 첫눈에 반하게 했던 그 순진하고 예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민주는 내가 나도 모르게 ‘감사합니다!’라고 외쳐버렸던 것을 들어버렸을까.
민주가 특별한 곳에 가고 싶다고 했던 그 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지난 사 년 동안 우리가 갔던 모든 장소를 물색했다. 처음에는 민주가 가장 좋아했던 장소, 가장 사랑했던 시간을 새롭게 기억하도록 해 주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어느 사진 속에서나 민주는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런데 수천 장의 사진 중에서 딱 한 장, 눈에 띄는 사진이 있었다. 서울 불꽃 축제에 갔다가 길을 잃어 불꽃은 구경도 하지 못하고 돌아온 날의 사진이었다. 괜히 미안해하는 내게, 민주는 여느 때처럼 웃는 얼굴로 괜찮다고 말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민주는 딱 한 마디를 했었다.
“불빛이 춤추는 걸 보고 싶었는데.”
그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 귀로 흘려버렸던 그 말들을 하나씩 맞추어 나가다 보면, 민주의 마음도 제 자리로 돌아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한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빛처럼 어둑한 날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았다. 차마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가 없는 분이니까.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다가 조금은 진지하게 묵례를 했다. 가볍게 바람이 일자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내가 선생을 이토록 추억하는 건 선생에 대한 감사와 존경도 있겠지만 생각이 가진 무게와 선생이 늘 지니고 있던 칼의 무게 때문이다. 어찌 보면 나라의 한 국민이었고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그가 그 기다란 칼 하나에 온 백성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야 했기에 그 짐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생각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하루에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할 것이고 그것은 단 한 사람의 목숨이 아니라 이 나라 이 백성들의 목숨이고 이는 한 가정의 기둥의 목숨이기 때문에 늘 고뇌에 차있고 누구보다 두려웠으리라 생각한다. 눈을 뜨고 감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고 말 한마디에 수백만의 목숨과 나라가 달려있었기에 태산 같은 두려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으리라.
그래도 그가 그의 삶을 다하는 순간까지 지키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긴 칼로 누구를 벨 것인가. 내가 베고 있는 것이 적장의 목숨일까 혹 자신의 삶이 아닐까 선생은 하루에 수도 없이 고민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직분을 숙명처럼 고스란히 받아냈다.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다.
갑옷의 무게만큼이나 무겁고 고된 삶 때문에 선생은 지친 몸을 뉘일 때도 차마 그 짐을 내려놓지 못했다. 언제든 일어나 적과 맞설 수 있도록 갑옷을 입고 칼을 옆에 두었을 것이다.
날이 점차 밝아졌다. 조금은 무거운 바람이 일자 대나무 숲에서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늘 한적했다. 사람이 거의 없었고 조용했다. 짙은 안개가 발아래 깔린 것만큼 진중하여 숨소리 한번 내기가 조심스러울 정도다.
내가 가진 삶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가진 무게는 도대체 얼마나 되기에 이렇게 힘들어 하냐고 내 자신을 채찍질 하고 싶을 때 이곳을 찾곤 한다.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낼 때. 이곳을 찾아 그분을 생각한다.
한참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아무런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음에도 이곳을 찾으면 큰 위로를 받곤 한다. 그분의 칼을 보고 위로를 받는다.
날은 이제야 겨우 한낮의 빛을 찾았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요란한 벨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친구의 전화다.
“어디야? 지금 너희 집 근천데 나올래?”
“나 지금 아산이야.”
“너 또 현충사 다녀오는 길이야? 너도 참 대단하다. 사실 장소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매번 갈 때마다 새로워?”
“장소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니까. 네가 뭘 알겠냐.”
“학교에서도 존경하는 위인하면 한결같이 이순신장군이라고 쓰더니... 그래서 언제 올라오는데?”
“지금 가는 길이야.”
다시 이곳을 찾을 때에는 내 삶의 무게에 대한 답을 들고 오고 싶다. 그리고 선생과 함께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이왕에 놀러가는 거 좀 멀리 갈 것이지, 이게 뭐야?”
열 살짜리 동생은 신이 났지만, 올해 중학생이 된 지훈이는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방학을 맞아 처음으로 나선 가족 나들이인 만큼 해수욕장 같은 떠들썩한 곳으로 갈 것을 예상했는데, 아버지가 서울에서 한 시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여주의 신륵사로 템플 스테이를 하러 가자고 하셨기 때문이다. 어제 저녁부터 결사반대를 외쳤지만, 어머니와 동생이 아버지 편을 드는 바람에 지훈이가 다수결에서 밀리고 말았다.
“우와, 형! 저것 좀 봐!”
시무룩한 얼굴로 휴대전화만 내려다보고 있던 지훈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찻길 옆으로 돌연 바다가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마음에 드냐? 네가 계속 토라져 있어서 잠깐 들렀다. 꿩 대신 닭이라고 저수지라도 좀 봐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다가 아니라 바다처럼 커다란 저수지였다. 지훈이는 아버지가 고갯짓으로 가리키신 곳을 보고 저수지 구경을 하다 말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저게 한 이백 미터 정도 되는 미끄럼틀이야. 아마 우리나라에서 제일 길다고 하지? 한 번 타 보고 갈래?”
“네!”
“다 큰 척 하더니 아직 애는 애구나.”
어머니가 웃음을 터뜨리셨다. 자세히 보니 저수지만 휑하니 있는 게 아니라, 광장도 있고 체육 시설도 꾸며져 있었다. 지훈이도 동생도 미끄럼틀에 잔뜩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지훈이네 가족은 잠시 저수지변에 차를 대고 쉬다 가기로 했다. 지훈이는 동생과 함께 몇 번이나 미끄럼틀을 탔다.
“아, 이렇게 재밌는 것만 많으면 좋을 텐데.”
다시 길을 떠나게 되자 지훈이가 아쉬운 목소리로 투덜댔다.
“녀석, 가보기도 전에 그러면 안 되지. 거기 가면 염주도 만들 수 있고, 연꽃도 만들 수 있어. 어디 보자. 이 근처에 세종대왕릉도 있고 주록리도 있지. 오늘 하루 절에서 자고, 내일은 요 근처를 좀 돌아다녀볼까?”
“주록리? 그건 그냥 마을 아니야?”
“그냥 마을이라니. 사슴 마을이야.”
사슴 농장이 있는 마을인가 했더니 그건 또 아니었다. 주록리는 달릴 주 자에 사슴 록 자를 쓰는데, 사슴이 달릴 정도로 깨끗하고 맑은 곳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마을이 생기며 사슴은 전설 속으로 사라져버렸지만, 주록리는 여전히 가재가 잡힌다고 한다.
“가재뿐이냐? 반딧불도 볼 수 있다, 반딧불도. 게다가 여기 이 금사저수지는 팔뚝만한 잉어가 잡혀서 낚시꾼들이 아주 좋아하는 곳이야. 박물관도 있고 이 근처가 볼거리가 아주 많아서, 나라에서 아예 나들이길 코스를 짜 놨을 정도라니까?”
결혼하시기 전까지 여주에 사셨다는 아버지는 명성황후 생가며 금싸라기 참외, 목아 박물관 등등 여주의 자랑거리들을 잔뜩 늘어놓으셨지만, 지훈이의 머릿속에는 계속 사슴이 맴돌았다. 사슴은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마을 이름이 될 정도로 사슴이 많이 살던 곳이 근처에 있다니!
“아빠, 그 주록리에 살았다는 사슴 말이야. 아직도 있을까?”
아버지는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사슴이 전설 속으로 사라진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 사람들을 피해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간 거라 아직 사슴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셨다.
“확실한 건 나도 잘 모르지만 말이야.”
신륵사에 도착해서도 지훈이는 뒷산을 계속 힐끔거렸다. 남한강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풍경도 멋졌지만, 산 너머로 사슴 한 마리가 갑자기 고개를 내밀 것만 같았다. 아까 아버지가 하신 말이 떠올랐다.
“혹시 모르지, 신륵사 뒷산으로 가서 살고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