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에 내려온 지 얼마나 지났을까. 날이 갈수록 날짜 세는 데에 무심해지고 있으니, 오늘 날짜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하루를 보내는 일이 다반사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부정적인 일이 아니다. 내가 쓰는 시간을, 내게 남겨진 시간을 세는 것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을 뿐이다.
내가 그리는 그림은 꽤 인지도가 있다. 추억을 남기려 내 앞에 앉은 사람들에게, 나는 꼭 배경으로 노을 진 바다를 함께 그려준다. 그것도 붉은 빛이 아니라 노란 빛깔로 노을 져 가는 바다를 말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단순한 서명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여기에는 나만 알고 있는 사연이 있다.
무작정 그림을 그리겠다고 해운대로 내려왔다. 집안의 반대가 심하여, 어렵게 들어간 미술 대학을 졸업하지도 못하고 경영을 배우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집을 떠나던 날, 어머니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꼭 안아주셨다.
“넌 어디 가서든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나를 더 붙잡지 못하고 이 말만을 전하실 때의 그 심정이 어떠했는지, 나는 아직 모두 이해할 수 없었다. 꼭 성공하겠다는 막연한 한 마디를 남기고 그대로 집을 나왔다.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차에 부산 쪽에 살고 있는 친구가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캐리커처를 그려 주는 사람이 많다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고작 몇 시간 뒤에 해운대에 닿을 수 있었으나, 해변에서 캐리커처를 생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내게 쉬이 자리를 내어 주지 않았다. 무턱대고 사람이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아쿠아리움 앞에 앉아 자리를 폈다가 싸움이 붙을 뻔한 적도 있었다.
어느 흐린 날, 백사장 끝까지 밀려난 나는 그 날의 장사를 포기하고 해변을 따라 걸었다. 집을 떠나면 어머니의 된장찌개가 제일 먼저 그리워진다더니,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지금쯤 뭘 하고 계실까. 분명 비어있는 내 방에 들어가 내 물건들을 다시 정리하시고 계실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꽤 멀리까지 와 버렸다. 친구들과 몇 번 놀러 온 적이 있어 해운대 번화가의 지리는 꽤 잘 아는 편이었지만, 해수욕장을 벗어난 적은 없었다. 작은 목조계단이 보이고, 어느 새 동백섬 입구를 마주하게 된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동백섬으로 들어갔다.
앞길이 깜깜할 때 바다를 보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다. 망망대해 앞에 서 있으면 내 자신이 얼마나 작고 초라한 존재인지를 절로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순수 미술을 전공하겠다는 사람이 이만 원을 받고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일을 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었다. 기분만 우울해지는 것을 괜히 올라왔다고 생각하며 다시 계단을 내려가려던 그 때, 내 앞에 인어공주가 나타났다.
바위 위에 올라앉은 그녀는 아름답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는 대신, 한 손을 가슴에 얹은 채 발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손에는 구슬이 하나 들려 있고, 옷자락 아래로는 물고기의 꼬리가 숨겨져 있다. 무슨 연유인가 하니, 이 공주의 외할머니의 나라는 바다 아래의 수정국이며, 어머니의 나라는 바다 건너 나란다국이라 하였다. 공주가 이 동백섬에 시집을 와서 왕비로 살다가 두 나라를 몹시 그리워 하니, 그녀가 가진 황옥에 달 밝은 밤이면 두 나라가 비쳤다고 한다.
나는 청동상으로 만들어진 이 인어공주의 모습에서 기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때마침 해가 저물기 시작했는데, 흐린 날의 일몰은 새빨간 홍옥이 아닌 노오란 황옥 빛깔이었고, 그 공주의 이름도 모국의 이름을 따서 황옥이라 하였다. 황옥 공주의 쓸쓸한 등 위로 노랗게 타는 노을빛이 내리니, 나는 그때야 이 바다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해운대 앞바다가 아닌, 고향을 그리워하는 황옥 공주가 앉아 있는 동백섬 앞바다를 말이다.
집을 떠난 지 한 달. 나는 그날에서야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눈물이 핑 돌았지만, 쉽게 돌아가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화가로서 당당하게 내 자리로 돌아가겠다는 다짐과 함께, 나는 그림마다 노랗게 타는 노을을 그려 넣었다. 찌푸리고 있던 인상을 펴자 다른 그림쟁이들과도 친해질 수 있었다. 하루하루, 느리지만 차근차근 내 자리를 잡아 지금에 이르렀다.
인적이 드물어지는 시간이면, 가끔 황옥 공주 옆에 가 앉아 함께 황옥을 들여다본다. 그녀의 황옥에는 가끔 우리 집이 비치곤 한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그녀에게, 이제는 내가 되려 위로를 건넨다. 돌아갈 곳이, 그리워 할 곳이 있기에 바다가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한 번뿐인 인생 하고 싶은 거 하며 살아야지. 그동안 당신 힘들었던 거 알아. 누구보다도.”
이제는 원망이나 설득을 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다. 원망이나 설득의 마음이 없다고 해도 그래도 남편이 마음을 돌려주기를 내심 바라는 마음은 있다. 홧김에 한 말이었다고 그냥 다시 예전처럼 지내고 싶다고 말해주길.
“연락 자주 할게. 아이들 데리고 자주 내려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하는 남편이다. 일주일 전만 해도 화를 내고 시부모님께 일러보기도 하고 협박까지 했던 아내였기에 남편의 말 한마디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남편은 안정된 직장에서 남부럽지 않은 연봉에 인정받는 사람이었고, 가정에서는 집안일도 잘 도와주고 아이들이라면 끔찍이 아끼던 최고의 가장이었기 때문에 남편의 선택을 받아들이기가 더욱 힘든 아내였다. 생활비 한 번 허투루 쓴 적 없는 모범답안과 같던 남편이 돌연 귀농 생활을 통보한다. 처음에는 권유였으나 나중에는 혼자라도 가겠다고 통보를 한다.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묵묵히 함께 살아온 30년. 아이들을 다 키워놨다고 생각해서일까. 일주일간 아내는 잠도 제대로 못 들고 남편의 생각을 읽으려 노력했다. 도저히 모르겠다. 무슨 영문인지.
생각에 변함없음을 알리는 남편의 대답에 이젠 이런 실랑이도 소용이 없음을 받아들였다.
결국, 남편은 홀로 횡성으로 떠났다. 예전의 남편이라면 아내가 싫다고 할 때 마음을 접었을 것이다. 고집불통이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싶은 생각도 든다. 무작정 우겨 내려온 것이지만 단출한 살림에 어떤 것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귀농 생활이었다. 일단 무작정 장에 가보기로 한 남자는 우연히 소 한 마리를 얻어 기르게 되었다.
큰 눈을 껌벅이는 소를 바라보니 어릴 적 남편과 닮았다. 남편은 큰 눈에 겁이 많아 소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소와 남편은 닮은 점이 많았다. 큰 눈을 껌벅이며 남편을 바라보는 것이 이 녀석과 잘 지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논농사를 지을 것도 아니고 특별히 밭을 갈 일도 없는 남자였지만 남편은 소를 애지중지 키웠다. 아내가 바라보았다면 질투를 느낄 정도였다.
귀농 생활이 어느 정도 제자리를 잡을 즈음 아내가 왔다. 아내는 오자마자 집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마당에 자리 잡고 있는 소를 바라본다. 이젠 소까지 키우느냐며 농사꾼이 다 됐다고 웃는다. 아내가 오랜만에 웃는다.
아내도 자신이 빙긋 웃는 것이 어색했는지 슬쩍 말을 돌린다.
“혼자 피죽도 못 얻어먹고 사나 했더니 제법 살림꾼 다되었나 보네. 딸린 식구도 있고. 하긴, 횡성 하면 한우지. 이 소는 잡아먹으려고 키우는 거야?”
아내는 겁이 많고 큰 눈을 껌벅이는 소를 향해 잡아먹으려고 기르는 거냐며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아내가 낯설게 느껴졌다. 아내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소여물을 다듬었다. 하지만 아내의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잡아먹으려고 키우는 거야?
소를 끔찍이 생각하던 횡성사람들이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점점 줄고 소들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로 접어들자 횡성사람들은 소를 식용으로 키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에겐 여전히 소는 가족과 같은 존재이다.
아내가 돌아갔다. 아내는 은밀히 여기 내려와서 같이 지내는 것도 괜찮겠다고 이야기했다.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물론 함께 지내는 것이 더 좋을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남편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큰 눈을 껌벅이는 소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일까.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뒤, 일곱 살 터울의 우리 남매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왔다. 친척집에서 독립한 뒤로는 오빠가 밤낮없이 아르바이트를 하여 생활비를 충당했고, 둘 다 무사히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뒤에는 몇 년을 더 일하여 작은 카페 하나를 차릴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다툰 기억이 거의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주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마음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서로를 이해하려 무던히도 노력해 왔고, 기쁜 일이 있어도 고민이 있어도 가장 먼저 서로에게 말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오빠와 말다툼을 하는 일이 많다. 아마 내가 연애를 시작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여느 가정의 오빠들처럼, 우리 오빠도 내 동갑내기 남자친구를 덮어두고 싫어했다. 하지만 나도 이제 스물여덟이었다. 누군가의 보호자가 되어도 될 나이에 여전히 보호받고 있다는 것은 때로 나를 갑갑하게 만들었다.
“다희야, 너 또 걔 만나고 늦게 들어온 거야? 오빠가 말했잖아. 걔는 안 된다니까?”
나는 오빠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거실에서 오빠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방 안까지 들렸다.
오빠의 마음을 아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빠가 성인이 되었을 무렵에도 나는 초등학생이었으니, 오빠가 나를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빠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누구보다 잘나게 살길 바라고 있었다.
내 남자친구는 잘 생기지도 않았고, 집안에 돈이 많지도 않으며, 돈을 많이 벌지도 못한다. 오빠가 바라는 내 신랑감이란 내 남자친구와는 정 반대의 인물이었다.
어느 날은 오빠가 남자친구의 험담을 심하게 하는 바람에 내가 울음을 터뜨리며 소리를 지른 적이 있었다. 오빠는 마치 사춘기의 딸을 처음 대하는 아버지처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는 나대로 감정이 상하여, 그대로 방문을 걸어 잠가 버렸다. 자기가 잘못했다며, 이 문 좀 열어보라는 오빠의 말이 계속 들렸지만 안 들리는 척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일어나보니 오빠가 오랜만에 나들이나 가자며 도시락을 싸고 있었다. 나는 나대로 오빠에게 미안하여 슬그머니 도시락 싸는 것을 도왔다. 그런데 오빠가 뜻밖의 말을 전해 왔다. 내 남자친구도 함께 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도착한 곳은 벽화마을이었다. 얼마 전에 조성된 마을이라고 들었는데, 다른 벽화마을들이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는 데에 비해 이 마을의 분위기는 완전히 시골이었다. 토담이나 돌담 위에 지게, 황소, 저고리를 입은 아이들, 단풍과 꽃 같은 것들이 그려져 있으니 말이다. 그 분위기가 너무 따스하여 홀린 듯 골목들을 걸었다.
오빠는 남자친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를 잠시 따로 데리고 나왔는데, 오빠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가니 이상하게 생긴 나무가 서 있었다.
“어, 이게 뭐야? 연리지는 봤는데 뿌리가 얽힌 건 처음 보네.”
우리나라에서 한 그루밖에 없는 귀한 나무라고 했다. 오빠는 나무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사실 네가 죽을 때까지 나랑 함께 살았으면 했어. 솔직히 네가 나한테 동생이겠냐, 딸이지. 엄마랑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그 때는 나도 중학생이었어. 초등학교에도 못 들어간 네가 엄마 보고 싶다고 울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더라. 넌 그 때 어렸으니까 기억나지 않겠지만 고모도 우릴 많이 싫어하셨어. 너도 이제 시집 갈 나이이고 하니까, 네가 갑자기 결혼해서 집을 나가겠다고 하면 내가 누굴 보고 살아야 할지 막막하더라.”
나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말을 마친 오빠는 ‘데이트 재미있게 해.’라며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어렸을 때라고는 해도 여섯 살 무렵의 일인데 왜 기억나지 않겠는가. 나도 다 기억하고 있었다. 불쌍한 우리 오빠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바로 일을 하러 갔다. 고모에게 제 손으로 번 양육비를 드리고, 몰래 저축을 하여 나와 함께 도망치듯 고모 집을 나왔다. 내가 잠든 뒤에 집에 들어오고, 내가 잠에서 깨기 전에 집에서 나갔기에 나는 제대로 된 우리 집이 생긴 뒤에야 오빠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자친구가 멋쩍게 웃으며 ‘내가 더 잘해야지.’라고 했다. 아무래도 자기가 많이 부족한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오빠는 그냥 투정을 부리고 있을 뿐이야.”
나는 웃으며 눈을 감았다. 가족처럼 정겨운 분위기로 물들어 있던 마을, 그 한 구석에 같은 땅을 붙들고 서 있던 연리목이 꼭 우리 남매의 모습 같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지겹도록 건조한 일상의 반복이 시작된 것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꽤나 오랫동안 나는 이 생활을 지속해 왔고 지금은 그 생활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마치 오랜 기간을 만난 연인 사이에는 더 이상의 설렘과 풋풋함이 없는 것처럼. 그래서 그런거였을까. 오래 만난 연인에게 늘 찾아온다는 권태기처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건조하고 팍팍한 일상에서 한 번 벗어나 보고 싶다, 뭔가 말랑말랑하고 몽글몽글한 새로움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또 일상에 문득 찾아온 권태기가 점점 사그라들 때쯤, ‘딩동’하는 핸드폰 알람음이 울렸다. 가끔씩 눈요기용으로만 사용하는 SNS 친구신청 알림메시지였다.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내 인간관계에 새로울 사람이라고는 없는데 하는 생각과 함께 친구 신청한 그의 이름을 보니 어렴풋이 머릿속에 들어오는 세 글자, ‘조수호’.
그였다.
작년 여름, 한 9개월 전쯤이었지 아마. 회사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원하는 날짜에 휴가를 받지 못하고 남들 다 여름을 즐기고 난 후에나 느지막이 3일 휴가를 받았었다. 그래도 나름 휴가인데 하는 마음에 아무 계획 없이 덜컥 기차표부터 끊어 놓았다. 목적지는 파주, 지방에 사는 나로서는 최고의 결정이자,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나의 파주로의 반짝 휴가는 시작되었다. 여행은 늘 언제나 그렇듯 향하는 곳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적어도 나에게 파주는 그런 도시였다. 잘 알지 못하는 곳에 대한 두려움과 그래서 더 많이 보고 느끼고 싶다는 벅찬 욕심을 안고 기차에 올랐다. 기차여행에는 음악이 빠질 수 없단 생각에 준비한 라즈베리필드의 ‘청춘열차’라는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혼자라도 왠지 기분이 좋은 여행길 / 설렘 가득 안고 달려가고 있어 / 낡은 철길 위로 맑은 하늘 바라보네 / 내 마음은 바람소리에 맞춰 춤을 춰
노랫가사가 내 마음의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행복하고 행복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파주의 모습은 파랬다. 파아란 하늘과 초록나무로 가득 찬 이곳이 왠지 모르게 좋았다. 제일 먼저 발걸음이 향한 곳은 말로만 듣던, 아니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너무나도 아기자기하고 예뻤던, 파주출판단지였다. 좋아하는 것 세 가지를 꼽으라면 엄마, 돈, 책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책은 그런 존재다 내게, 그래서 더 ‘파주’라는 곳이 특별한지도 모르겠다. 과연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어떤 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는지 직접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고, 행운이었다.
‘행운’, 아마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조수호’. 그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출판단지 안에 있던 지혜의 숲이었던가. 온통 책으로 뒤덮인 그 곳에서 나와 그는 처음 만났고, 서로 통하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그의 미묘하지만 애써 담담하게 건넨 첫마디는 ‘저.. 책 좀 추천 부탁드려도 될까요?’였다. 그리고는 시작된 우리의 이야기는 그날 해가 저물 때까지 계속되었고 급기야는 다음날 임진각까지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알고 보니 그는 파주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였다. 그럼에도 일부러 그러는 건지, 진짜 어리숙한 사람이여서 그랬는지 임진각을 가는 데에도 꽤나 애를 먹었다. 그래도 참으로 오랜만에 새로운 사람과 만나 함께 서로의 마음과 이야기를 공유한다는 것은 꽤나 신선하고 즐거운 일이였다. 그렇게 3일이라는 시간을 그와 파주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때로는 말할 수 없는 어색함이 감돌기도 했지만 그래서 더 두근거리고 떨렸던 나의 여행. 그는 더 오랜 시간을 나와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듯 보였지만 이제는 현실의 나로 돌아와야 할 때였다. 기차역까지 바래다주면서 그는 말했다. ‘은하씨, 우리 또 만나요. 또 만나고 싶어요.’라며, 그렇게 나는 떠나고, 그는 남았다. 그리고 그 뒤로 간간이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연락을 주고받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점점 연락을 하는 횟수가 뜸해졌고, 절대로 마르지 않을 것 같은 이야깃거리도 다 써버린 듯 형식적인 인사들만 주고받다가... 그렇게 서로를 조금씩 기억의 저편으로 묻어버렸다.
그런데 지금 딱, 내가 일상에서의 나른함과 권태로움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걸 알기라도 한 듯 먼저 손길을 내민 그에게 나는 어떤 대답을 주어야 할까. 그냥 친구신청이라기엔 너무나도 오랜만이고, 그렇다고 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에도 너무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곧, 떠올랐다. 그를 위한, 아니 그와 나를 위한 명쾌한 대답을.
떠나기로 했다. 다시. 내가 좋아하는 책이 있는,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 있는 그 곳, 파주로.
갑자기 지난 여름의 기억들이 하나 둘 내 가슴 속에 와 닿으며 또 다시 새로운 추억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그래서 예전의 설렘과 풋풋함, 새로움이 가득한 나 자신을 되찾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이번에도 파주행 기차표를 덜컥 끊어버렸다.
“유리씨, 괜찮겠어? 오를 수 있겠냐고.”
걱정인지 귀찮음인지 모호한 어조로 말하는 팀장의 목소리에 괜히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지만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그럼요. 피해 안 가도록 천천히 뒤따라갈게요.”
팀장은 대답을 다 듣긴 한 것인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찬바람을 남기고 다른 팀원에게로 가버렸다. 가까스로 참고 있는 눈물에 손과 발이 미세하게 떨렸다. 팀장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자칫하다가는 큰 사고로 이어져 남은 사람들에게 그동안의 삶처럼 짐이 되어버릴 수 있으니까.
유리는 선천적으로 하반신 근육과 뼈가 약해 약한 충격에도 쉽게 부러지곤 했다. 그래서 다섯 살 때부터 그녀의 엄마는 언제나 괜찮겠어? 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그래서 그녀는 남들 한 번씩은 다 타본 자전거도 타본 기억이 없고 그 나이 때 여자아이라면 누구나 다 해본 고무줄놀이 한번 못해봤다. 사실 해볼 생각도 못 해봤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행복한 기억 중 하나인 운동회 날의 기억을 묻는다면 사실 나는 즐거웠지만 엄마는 오히려 엄마가 학교에 말해 줄 테니 학교에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된다고 했다.
그런 재미없는 학창시절을 보낸 뒤 직장생활의 첫발을 내디딘 그녀다. 어릴 적부터 늘 고민이면서 꿈이었던 문제가 드디어 터진 것이다. 처음으로 입사한 회사에서 갖는 첫 워크숍을 치악산으로 온 것이다. ‘악’이 들어가는 산은 바위로 이루어져 산세가 험하여 건장한 남자들도 힘들다고 한 것쯤은 유리도 안다. 그래서 엄마는 물론 팀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를 말렸다. 하지만 그녀는 굳이 우기고 우겨 따라가겠다고 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을 거야.’
마음속으로 수십 번 수백 번을 되뇌어 왔지만 사실 그녀도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이곳까지 따라오면서 그녀가 생각한 것이 있고 약속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워크숍을 따라 오기로 작정한 후 줄곧 생각한 것이 있다. 바로 코끼리와 말뚝 이야기이다.
서커스에서는 작은 코끼리를 어렸을 때부터 말뚝에 메어둔다. 발목에 족쇄가 채워진 아기 코끼리는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벗어날 수가 없다. 그렇게 자란 코끼리는 나뭇가지만 한 말뚝을 충분히 뽑아내고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벗어나지 못한다. 이미 코끼리는 어렸을 때부터 불가능 할 것이라고 되뇌어왔기 때문이다.
다시금 팀장이 내게로 왔다.
“유리씨. 유리씨가 간다고 하니까 말리지는 않을게. 근데 유리씨도 참 유별나다. 남들은 오르기도 전부터 힘들다고 저렇게 울상인데 굳이 가겠다고 하는 이유가 뭐야?”
“말뚝에서 좀 벗어나 보려고요.”
유리는 발가락을 잠시 꼼지락거려본다.
‘나도 그렇지 않을까. 나도 어쩌면 자전거도 타고 고무줄놀이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어 놓은 한계에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드디어 한 걸음 발을 떼어본다. 어쩐지 발이 가볍다.
“아빠, 이번 연말에는 어디 갈 거예요?”
딸의 머릿속에는 이미 가보고 싶은 곳이 가득한 것 같았지만, 이번에는 산통을 좀 깨야겠다. 나도 내년에는 꼭 내 시집을 내리라 결심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번에는 멀리 가지 말자. 연말 되면 카운트다운 하는 곳 있잖아. 거기 가서 타종식 한 번 보고 오는 건 어때? 아빠가 옛날에 가 봤는데, 가수들도 많이 오고 불꽃놀이도 해.”
싫다고 떼를 쓰면 어떡하나 하고 있었는데, 자기도 그런 의미 있는 곳에 가는 게 좋다고 하는 것을 보니, 딸도 이제 어린애는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내도 꼭 한 번 직접 타종식을 보고 싶었다며 한 수 거들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가족의 연말 맞이 여행, 아니 연말 맞이 나들이 장소가 결정되었다.
서울 시내 어디가 북적거리지 않겠냐마는, 내가 젊은 시절부터 가장 좋아하는 북적임이 있다. 바로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일대. 시간이 비는 오후면 교보문고에 들러 소설책을 한 권 읽고 가기도 하고, 아직 초등학생인 조카들을 데리고 세종대왕 동상과 그 아래 숨겨진 박물관을 견학하기도 했다.
몇 년 전, 수많은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모였던 촛불집회가 열렸던 곳도 바로 이 세종대왕 동상 앞이다. 그리고 대학생 시절 사회 운동을 하러 나왔을 때, 회사원들이 건물 창밖으로 두루마리 휴지를 던지며 무언의 응원을 보내던 장관도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졌었다. 젊은 시절 아내와 함께 거닐었던 경복궁이 동상 너머에 있었었으며, 청계천이 처음 조성되었을 때에도 이곳에서 시작되는 물길을 보러 왔었다.
그렇다. 내게 있어 광화문은, 내가 아는 수십 년의 서울의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다.
세 시간 쯤 여유를 두고 광화문에 도착했다. 몰려드는 인파를 한 번에 감당할 수 없어 타종식이 있기 얼마 전에는 교통을 통제하기 때문에 종각에 미리 가 봐야 소용이 없으니, 그 전에 가족들과 함께 이 광화문 일대의 문화를 느껴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은 또 크리스마스였기에, 거리는 아직 오색 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대부분의 상가들이 크리스마스와 연말 행사를 한 번에 챙길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야말로 ‘메리 크리스마스, 앤 해피 뉴 이어’였다.
나는 아내에게 근래에 크게 유행했던 로맨스 영화의 원작 소설 한 권을, 아내는 딸이 요새 푹 빠져 있는 외국 밴드의 앨범 한 장을, 딸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의 새로 나온 시집 한 권을 선물했다.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건실한 문화 향유층이야. 문화 시민이 달리 뭐 있겠어?”
딸이 건넨 말에 한바탕 웃으며 교보문고를 빠져나왔다. 청계 광장을 한 바퀴 둘러보러 왔는데, 청계천에도 언제나처럼 아름다운 조명들이 밝혀져 있었다.
“여기서 예전에 등 축제 정말 예뻤는데. 아빠가 매일 그렇게 광화문 노래를 불러도 안 와 닿더니, 그 때는 정말 세상에서 여기가 제일 아름다운 것 같았다니까요.”
그래, 문화라는 것이 말로 백 번 들어 무엇 하겠는가. 한 번 눈으로 보면 단숨에 반해버릴 것을. 내 철학을 늘어놓았다가는 면박을 면치 못할 것이기에, 마음속으로 할 말을 삼키며 웃었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제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여기저기서 전화를 걸어 ‘새해 복 많이 받아!’하는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무척이나 정겨워 보였다. 오죽하면 이 일대에서만 휴대전화가 반쯤 불통이 되었겠는가. 사람들의 입가에는 하나같이 함박웃음이 걸려 있었다.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신나게 소리를 지르다 보니 행사는 모두 끝났지만, 하늘에는 여전히 삼천 원짜리 싸구려 불꽃이 팡팡 터진다. 화약재가 그대로 떨어져 내리는데, 아무도 얼굴을 찌푸리거나 옷을 털어내지 않았다. 우리 가족도 노점상에서 파는 핫도그 하나씩을 들고, 축제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광화문을 걸었다. 평소에는 길거리 음식이라면 학을 떼는 아내도 오늘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지금 이곳이 바로 살아 숨 쉬는 서울 문화의 거리였다.
해가 중천에 떴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여전히 이불속에서 꿈틀거렸다. 아침밥은 칼같이 먹어왔던 생활습관 때문에 우리 집 아침 식사는 늘 6시 반이었다. 평소와 같이 6시면 주방에 있어야 할 아내가 어쩐 일인지 오늘은 여태 방안에 있다. 주말 아침이라 그런가 싶어 내버려 두었으나 시계바늘이 7시를 막 넘어가니 배도 고프고 해서 아내를 깨우기로 했다.
“이봐, 이제 그만 일어나. 어? 지금 몇 신줄 알어? 나 배고파.”
“아이 참. 당신은, 밥통에 밥 있고 냉장고에 반찬 있는데 그것도 하나 못 꺼내 먹어서 이러는 거예요? 나 좀 쉬자고요. 제에발.”
“여태 누워있었으면 됐지 뭘 더 누워있으려고해? 빨리 밥 줘,”
“몸살이 왔는지 지금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오늘 아침만 좀 넘어가자고요.”
아내는 다시 이불을 똘똘 말고 애벌레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는 사람이 무슨 몸살이냐고 물어보려다 괜히 불똥이 튈까 말없이 냉장고로 향했다. 아내말대로 밥통에는 밥이 있고 냉장고에는 반찬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주말이라 애들도 다 약속 있다고 나가버리고 아내와 단 둘이 있는 집에서 혼자 아침을 먹으려니 괜히 서글퍼졌다.
꺼내던 반찬통을 다시 냉장고에 집어넣고 아내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봐. 몸살 났을 땐 낙지가 최고야, 낙지 사줄 테니까 먹으러 가자고.”
“당신이 웬일이래?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큰일 난다던데 아픈 게 내가 아니라 당신 아니야?”
“이 사람이, 사준대도 뭐라 그래? 싫으면 관둬.”
“누가 싫대요? 가요. 가자고요.”
아내는 힘이 없다더니 목포로 내려가는 내내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멋이라곤 하나 없던 양반이 오늘은 왜 이러냐면서 싱글벙글이다. 평소 무뚝뚝한 성격에 아내에게 살가운 말 한 번 못하긴 했어도 무신경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아내는 참 별 거 아닌 것에 감동스러워했다.
채 정돈이 안 된 옛 부두를 지나 재래시장이 줄줄이 늘어선 항구를 찾으니 바다 냄새와 생선의 비릿한 냄새가 풍겨와 코끝을 간질였다. 부서지는 파도소리가 시원했고 낯선 항구도시는 언제나처럼 반가웠다.
바닥에 야트막히 물이 고여 있고 장화를 신은 장사꾼들은 싱싱한 물건이 많이 들어왔다며 손짓했다. 다른 것은 볼 것도 없이 세발낙지를 쓱 둘러보는데 주인이 흥정을 걸어왔다.
"뭣 찾으신다요?"
"저거, 저 세발낙지는 얼마요?"
"아 세발낙지 좋지요. 6마리에 3만원인데 특별히 큰 놈으로다 7마리 넣어드릴랑게 여서 드시고 가시쇼.”
"비싸네."
"뭐시 비싸다고 했싼다요? 크기는 이래봬도 한 마리만 자시면 힘이 벌떡 벌떡 솟는 당게요."
"한마리만 더 주면 안 될까요?"
"아따 사장님도 차암. 에이, 그렇게 허요."
흥정을 마치고 자리에 앉으니 매콤한 양념장에 돌돌 말은 낙지 호롱구이와 갈낙탕이 차례로 나왔다. 주인의 걸쭉하고 호탕한 말만큼이나 음식도 푸짐했다. 나무젓가락에 돌돌 말린 호롱구이를 베어 물던 아내는 음식을 채 삼키기도 전에 실웃음을 터트렸다.
“풋. 당신 오늘 이상하네.”
“낙지 먹다 말고 뭐가 또.”
“당신이 흥정을 다하고. 내가 알던 사람 맞나 싶어서. 크큭”
“싱겁긴. 식기 전에 얼른 먹어. 한 마리만 먹어도 힘이 불끈 솟는다는데 어때, 기별이 좀 와?”
“글쎄~ 한 마리 더 먹어봐야 알겠는데?”
아내가 배시시 웃는다. 세발낙지가 힘만 불끈 솟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부간의 사랑도 불끈 솟게 만드는 힘이 있나보다.
결혼을 앞둔 여자의 목소리는 한껏 흥분과 설렘이 적절히 섞여 있었다. 그녀에게 세상은 핑크빛일 테고 파스텔 톤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상견례와 결혼 날짜까지 한 큐에 끝내버리고 요즘은 친정엄마와 혼수를 보러 다니고 피부숍을 다니며 생애 한번 있을 아름다운 날을 위해 온 신경을 쏟았다.
서른둘의 나이. 요즘으로 치면 적지도 많지도 않은 나이라지만 먼저 결혼한 친구들의 훈수 덕에 그녀의 머릿속은 적잖이 복잡해졌다. A는 근사한 카페를 통째로 빌려 피아노를 치며 영화의 한 장면처럼 프러포즈를 받았다더라. 친구 B는 청담동으로 시집간다더니 몇 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몇 세트를 받았다더라 하는 말들이 자연스레 들렸고 친구들은 며칠 굶주린 하이에나들처럼 여자의 결혼에 관심을 기울였다.
여자는 신경 쓰지 않고 남자친구에게 내색하지 않기로 마음먹고도 내심 신경이 쓰였고 기대가 되었다. 여자라면 누구나 그럴 거라며 자신은 속물이 아니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남자친구에게 대뜸 나 어디서 어떻게 프러포즈해줄 거냐. 몇 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워줄 거냐고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무엇보다 남자친구의 형편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여자의 얼굴엔 점점 그늘이 드리웠다.
오늘 예쁘게 입고와. 일 끝날 때 맞춰서 데리러 갈게.
남자친구의 문자다. 여자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예쁘게 입고오라니, 왜? 혹시 프러포즈하려고 그러나? 그렇담 뭘 입어야 하지? 야외에서 하면 좀 쌀쌀할 텐데 겉옷을 준비해갈까? 눈물을 흘려야 하나? 여자는 30초간의 짧은 순간에 몇 가지 생각들을 흘려보냈다.
귀여운 것. 조금 무뚝뚝하긴 했어도 예쁘게 입고 오라는 힌트까지 주다니. 여자는 한껏 들뜬 마음을 즐겼다. 언제 또 이렇게 행복하겠느냐며 이 순간을 즐기자고 생각했다.
여자는 자신이 아끼던 옷을 꺼내 입고 싱글벙글 하며 남자를 기다렸다. 남자는 칼같이 여자를 데리러 왔다.
“어디 가는 거야? 어디로 가는 건데? 응? 왜 예쁘게 입고 오라고 했어? 어?”
여자는 남자의 차에 타자마자 콧소리를 내며 남자에게 질문을 쏟아 부었다. 남자는 가보면 안다며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았고 여자의 기대감은 극도로 높아졌다.
그런데.
남자는 카페를 빌리지도 근사한 곳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러주지도 않았고 무릎을 꿇으면서 눈물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심히 스윽 건네는 반지케이스 하나.
이게 뭐야. 여자는 기쁨과 감동의 눈물을 준비해왔으나 서러움으로 흘릴 줄은 몰랐다. 여자는 기쁨도 감동도 하지 않은 채 말없이 반지케이스만 바라보았다.
“실망했어?”
그걸 말이라고. 여자는 이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차마 내뱉지 않았다.
“어떤 반지인지 궁금하지 않아?” 라고 말하며 반지케이스를 열었다.
붉은빛이 선명한 반지다. 루비인가. 동시에 남자가 말한다.
“루비 아니야. 빨간색을 띄는 희귀 다이아몬드도 아니고.”
“내가 하늘에 떠있는 별을 따다 달래 달을 따다 달래. 그냥 말 한마디 아니 말 한마디가 어려우면 꽃이라도 아니 꽃도 어려우면 노래라도. 그만하자.”
“알아. 네 마음. 섭섭하겠지 속상하겠지. 그런데 반지 꽤 의미 있는 거야. 이게 1월 탄생석으로 만든 거거든. 당신 생일이자 우리 결혼기념일이 될 1월.”
여자는 애써 침착하게 반지를 바라보았다.
“다음번 결혼기념일에는 근사한 카페도 빌리고 백송이 꽃도 준비하고 피아노도 배워서 노래도 불러줄게. 더 예쁜 반지와 함께.”
좀 전에 남자가 내민 보석은 가넷이었다.